AI가 만드는 정치·경제·기술 분야 7대 트렌드 제시 국가 AI R&D 전략 수립 돕고 경쟁력 제고 목적
한국전자통신연구원(이하 ETRI)은 정치·경제·기술 관점에서 인공지능(AI)이 만드는 제4차 산업혁명의 파동을 분석한 '2020년 AI 7대 트렌드' 보고서를 발간했다고 밝혔다. 부제는 '인식을 넘어서'(Beyond Perception)다.
ETRI '2020년 AI 7대 트렌드' 보고서가 제시한 7대 트렌드는 ▲ 또 다른 선택, 중국 AI ▲ AI 내셔널리즘 ▲ 증강 분석과 다크 데이터 ▲ R&D 혁신지능 ▲ 창작지능의 진화 ▲ AI 호문쿨루스 ▲ AI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컴퓨팅 폼팩터다.
첫 번째 '또 다른 선택, 중국 AI'은 정부 주도로 '데이터 가치사슬'을 창출하며 자신만의 AI 색채를 가진 길을 만드는 중국과 관련한 내용이다. AI 전략이 기술경쟁을 넘어 강대국 간 패권 경쟁을 촉발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두 번째 'AI 내셔널리즘'은 AI 선도 기업과 서비스들이 무역 거래제한 조치, 조세 제도, 개인정보 보호법 등에 의해 국경을 넘는 데 어려움을 겪는 상황에서 AI 기술이 정치 질서와 맞물리며 국가 간 과학기술 격차는 물론 강력한 무기화 가능성을 지적한다.
세 번째 '증강 분석(Augmented analytics)과 다크 데이터(Dark Data)'는 AI 기술은 기존에 없던 분석 기법을 통해 갖고는 있지만 활용하지 못했던 대다수의 데이터 범위와 분석의 한계를 없애고 인공지능이 인간의 의사결정을 돕고 통찰력과 새로운 가치를 제공하는 것을 설명한다.
네 번째 'R&D 혁신지능'은 AI 활용의 더 큰 가치는 연구자로서 인간이 생각하는 방식을 바꿔 R&D 생산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는 데 있다는 것을 강조한다.
다섯 번째 '창작지능의 진화'는 AI가 만든 그림, 소설, 영화는 인공지능이 창작까지 가능한 가운데 나아가 단순한 모방 수준이 아니라 인간을 넘어서는 설계, 전략 도출의 가능성에 주목한다.
여섯 번째 'AI 호문쿨루스'(Homunculus)는 AI 기술력을 보다 발전시키고 자율성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자동차, 드론, 로봇 팔 등 물리적 실체를 통한 외부 환경과의 상호작용 연구의 중요성이 더욱 커짐을 시사하고 있다.
일곱 번째 'AI 시대가 요구하는 새로운 컴퓨팅 폼팩터'(Form factor)는 Intel의 칩셋이 표준형 PC라는 폼팩터를 정의했듯이 AI 또한 GPU, ASIC 등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기에 새로운 전용 연산장치들이 어떠한 역할을 하며 시장 구도를 만들어나갈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고 설명한다.
보고서의 주 저자인 ETRI 기술경제연구실 이승민 박사는 "인류의 미래를 결정하는 것은 인간, 그리고 인공지능이다. 그만큼 AI 기술은 과거 세 차례의 산업혁명보다 더 큰 충격을 만들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공공데이터 2년내 전면 개방…AI 기반 전자정부·바우처 도입 , 수도권대학 AI학과 신증설 허용
정부 `2030년 AI경제효과 455조 창출` 청사진
`인공지능 가장 잘 쓰는 나라` 초·중등생부터 AI교육 확대
AI반도체 세계1위 `시동`걸고 펀드 조성해 스타트업도 육성
◆ 인공지능 국가전략 ◆
최기영 과기정통부 장관이 17일 인공지능 국가전략을 발표하고 있다. [이승환 기자]
정부는 17일 `인공지능(AI) 국가전략`을 발표하면서 2030년까지 디지털 경쟁력을 세계 3위로 끌어올리겠다는 계획을 밝혔다. 당장 내년부터 예산 1조4000억원을 투입해 인프라스트럭처 조성에 나서고, AI 기초연구를 강화하는 한편 서바이벌 방식 경쟁형과 사회문제 해결책을 제시하는 챌린지형 등 혁신적 방식 AI 연구개발(R&D)을 확대할 방침이다. 이를 통해 현재 선진국 대비 81~82% 수준인 AI 기술 수준을 2030년 95%까지 높일 수 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일본이 전 국민 AI 교육 의무화를 추진 중인 가운데 우리나라도 전 국민이 평생에 걸쳐 AI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교육 로드맵을 짰다.
모든 장병과 공무원 임용자가 AI 소양교육을 필수로 받도록 하고, 초·중등 학습시간에 소프트웨어(SW)·AI 필수교육을 확대하며 이를 위해 교원 양성·임용 과정부터 AI와 SW 과목 이수를 지원하도록 했다. 수도권을 포함한 전국 대학이 AI 관련 학과를 신증설할 수 있는 길도 열렸다. 정부는 AI 인재를 육성하기 위해 대학별로 100~300명에 달하는 결손 인원을 활용할 수 있도록 관련 규정을 바꿀 방침이다. 지금까지 대학들은 결손 인원을 편입학 정원으로 주로 배당했지만, 앞으로 원하는 대학은 어디나 이 결손 인원만큼 컴퓨터공학과 같은 기존 관련 학과 정원을 늘리거나, AI 전공 학과를 새로 만들 수 있게 됐다.
국내 연봉 수준으로는 AI 대학원 교수조차 충원할 수 없는 상황을 감안해 교수들이 기업에서 일할 수 있도록 `겸직`도 허용하기로 했다. 이렇게 되면 삼성전자나 SK하이닉스 같은 대기업에서 일하는 임직원들이 대학 강단에 설 수 있는 길이 열린다. 또 외국에서 일하던 인재가 한국에 취업하면서 강의까지 함께하는 것으로 인센티브를 강화하는 등 고급 인재 유입 효과가 있을 것으로 정부는 기대하고 있다. 현재 학과 개설 수준인 AI대학원 프로그램도 내년부터는 융합학과나 협동과정, 지역산업 융합트랙, 대학 내 센터 설립 등 다양하게 확대할 수 있을 전망이다.
이번 국가 AI 전략은 글로벌 AI 선도국과의 격차를 따라잡고 AI 강국으로 도약하기 위한 우리 고유 전략을 마련하는 데 중점을 뒀다고 정부는 설명했다. 차세대 금맥으로 꼽히는 AI 반도체와 관련해서도 글로벌 기업들이 주로 비메모리에 집중하고 있는 반면, 우리는 세계 최고 메모리 반도체 경쟁력을 지렛대로 활용해 시장을 선점한다는 계획이다. 세계적 수준의 전자정부 경쟁력을 활용해 `AI 기반 차세대 지능형 정부`로 탈바꿈하겠다는 복안도 있다. 이를 위해 내년 상반기에 주요 전자정부 시스템을 진단하고, 하반기까지 디지털 전환 로드맵을 수립하기로 했다.
`데이터 경제` 마중물을 붓는 지원책도 대거 나온다. 올해 시행해 좋은 반응을 얻은 `데이터 바우처`를 활성화하고 내년에는 `AI 바우처`를 신규 도입한다. 바우처 사업이란 데이터나 AI를 원하는 수요 기업과 공급 기업을 매칭하고, 정부가 구매 비용을 지원하는 사업이다. 개인이 데이터를 직접 소장하고 관리하는 `마이 데이터 사업`도 내년부터 속도를 낼 전망이다. 2021년까지 공공 데이터를 전면 개방하고, 진행 중인 빅데이터 플랫폼 사업을 활성화하는 등 민간 데이터 활용도 장려한다. 계획대로라면 현재 1500종인 공공·민간 개방 데이터가 4만5000종으로 크게 늘어날 것으로 보인다. 민간 데이터 지도를 구축해 이미 완료한 국가 데이터 지도와 연계하는 방안도 모색한다.
`사람 중심 AI` 전략도 핵심 전략 중 하나다. 정부는 AI로 인한 일자리 변화에 선제적으로 대응하기 위해 사회보험을 확대하고, 취업 취약계층을 위한 취업 지원 서비스를 제공하는 국민취업제도를 내년에 도입할 예정이다. 또 AI로 인한 윤리적 문제에 대응하기 위한 AI 윤리체계 마련에도 앞장서기로 했다. AI 국가로 탈바꿈하기 위해서는 규제혁신과 법제도 정비가 중요하다고 보고 내년 상반기에 포괄적 네거티브 규제 로드맵을 수립하고, `우선 허용-사후 규제`로 규제체계를 완전히 바꾼다는 방침이다.
주요 거점별 특성을 고려한 전국 단위 `AI 거점화 전략`도 나왔다. 첫 타자는 2024년까지 총사업비 3939억원을 들여 `AI 클러스터`로 탈바꿈하는 광주다. 광주는 자동차와 에너지, 헬스케어 융합을 목표로 세웠다. 정부는 이같이 지역별 특색을 살린 AI혁신 클러스터를 만들어 전국 단위로 AI 거점화 전략을 이어갈 방침이다. AI를 기반으로 한 스마트공장도 2030년까지 2000개로 늘린다. 내년까지 3000억원 규모 AI 벤처펀드와 3000억원 규모 미래기술육성자금을 신설하는 등 AI 스타트업 지원책도 마련했다.
최기영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장관은 "우리가 잘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는 생각으로 메모리 AI반도체를 우선 지원하기로 한 것"이라며 "하드웨어와 SW를 결합해 개발하면 우리가 세계적으로 앞서갈 수 있다고 본다"고 설명했다. 최 장관은 또 "세계 최고인 국민 교육 수준과 신기술 수용성 등을 고려해서 교육과 인재 육성에 집중했다"고 말했다. AI 국가 전략 컨트롤타워로 거듭나는 4차산업혁명위원회 성격은 크게 달라질 전망이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 관계자는 "대통령 주재 전략회의와 대국민 보고대회가 병행되는 만큼 부처별 추진 전략을 점검하면서 컨트롤타워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망했다.
벤 괴르첼 싱귤래리티넷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가 인공지능(AI)이 접목된휴머노이드(인간형 로봇) 소피아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사진 블룸버그
‘1 대 125의 싸움.’
인공지능(AI) 분야 전문인력 양성을 위한 우리나라와 일본 정부의 마스터플랜을 단순 비교하면 이런 그림이 나온다. 우리나라의 AI 전문인력 1명이 같은 분야의 일본인 인재 125명을 상대해야 한다는 이야기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는 올해 초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 주재로 ‘데이터·AI 경제 활성화 계획’을 발표하면서 “지난해 14조원 규모인 국내 데이터 시장을 2023년까지 30조원 규모로 끌어올리고, AI 유니콘 기업(기업 가치 1조원 이상 스타트업) 10곳과 전문인력 1만 명을 길러내겠다고 선언했다. 5년간 1만 명이니 매년 2000명의 전문인력이 새로 생기는 셈이다.
그런데 일본은 3월 29일 스가 요시히데(菅義偉) 관방장관(총리 비서실장 격)이 나서 매년 25만 명의 AI 전문인력을 양성하겠다고 발표했다. 1 대 125의 싸움이다. 물론 계획대로 순조롭게 진행된다는 보장은 없다. 하지만 단순한 숫자보다 더 신경이 쓰이는 건 내용의 구체성과 방향성이다.
먼저 일본은 AI 인재 수요와 공급을 치밀하게 계산해 필요한 인력의 수를 산출했고, 구체적인 인력 육성 방법도 제시했다. 일본 경제산업성은 당장 내년 말이 되면 AI 지식을 갖춘 인력이 30만 명가량 부족할 것으로 추산한다. 현재 일본 4년제 대학 학생은 학년별로 약 60만 명이다. 이 중 이공계, 보건계열 18만 명과 인문계 15%가량인 7만 명을 합쳐 매년 25만 명을 AI 관련 인재로 육성한다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 시대에 걸맞은 통섭형 인재 양성을 위해 ‘AI와 경제학’ ‘데이터 사이언스와 심리학’ 등 문과와 이과의 경계를 넘나드는 과목을 개설하기로 한 것도 눈길을 끈다.
반면 우리 정부는 “데이터와 AI 산업을 육성해 2023년까지 글로벌 선도 국가로 도약하겠다”는 거창한 목표에 비해 상황 인식과 세부 추진 계획은 빈약하다. 30곳으로 운영되던 소프트웨어(SW) 중심 대학을 얼마 전 35곳으로 늘렸고, 9월부터 KAIST·고려대·성균관대에 AI 대학원 개설을 확정 지었지만, 전문 교원과 연구자 수가 턱없이 부족한 데다 그나마 있는 전공자들도 열악한 국내 환경에 좌절해 다른 분야나 외국 기업으로 자리를 옮기는 경우가 많아 성공을 장담하기 어렵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이 대학 교육까지 완전히 뜯어고쳐가며 AI 인력 육성에 팔을 걷어붙이면서 ‘이대로 가다가는 글로벌 AI 연구의 양대 산맥인 미국과 중국 추격은 고사하고 일본에도 크게 뒤처질지 모른다’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우리나라와 일본의 AI 산업 경쟁력은 경제 수준에 비해 낮은 수준에 머물고 있다. 한국무역협회 국제무역연구원이 최근 발간한 보고서를 보면 일본과 우리나라가 보유한 AI 전문인력 수(2008~2017년 누적 기준)는 각각 3117명, 2664명으로 조사 대상 15개국 중 14위와 15위에 머물렀다. 1위 미국(2만8536명), 2위 중국(1만8232명)이었고, 이어 인도·독일·영국·프랑스·이란 등의 순이었다.
IoT 확산으로 AI 인력 확보 ‘비상’
세계 각국이 AI 인재 확보에 사활을 걸고 있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다.
빅데이터 기반 산업의 파이가 커지는 데다, 일상의 모든 영역이 인터넷으로 연결되는 사물인터넷(IoT) 기술이 확산하면서 ‘두뇌’ 역할을 하는 AI 기술의 중요성이 부쩍 커졌기 때문이다.
제조업과 유통, 물류 등 다양한 분야에서 AI 기술 접목 성공 사례가 쏟아져 나오면서 주요 기업들이 앞다퉈 관련 분야 투자를 늘리고 있는 것도 AI 전문가 확보가 시급해진 주요 원인이다.
아마존은 폭넓은 고객 데이터를 수집하고 AI를 통해 이를 분석∙적용하면서 시가총액 1조달러(약 1136조원)를 넘나드는 글로벌 초우량 기업으로 급성장했다. 빅데이터 기반의 AI 접목을 통해 최적의 상품과 서비스를 제공하는 건 어느새 전자상거래 서비스의 기본이 돼 버렸다.
일찌감치 AI 기술의 중요성을 파악한 미국과 중국의 경쟁은 ‘사이버 냉전’이란 이야기가 나올 정도로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일본의 경우에서 보듯 과거 높은 몸값을 주고 경쟁사의 인재를 빼 오는 차원에 머물던 AI 인재 확보 경쟁이 지속 가능한 성장을 위한 정부 주도의 교육 과정 혁신 노력으로 발전했다는 점은 주목할 만한 변화다. AI 인재 확보를 위한 주요국의 노력을 정리했다.
일본 정부가 최근 발표한 ‘연 25만 명 AI 인력 양성 계획’의 핵심은 ‘대학생이라면 누구나 최소한 프로그래밍(코딩)의 원리와 AI 관련 윤리를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 AI의 핵심인 ‘딥러닝’과 ‘알고리즘’을 체계적으로 이해하고 응용할 수 있도록 교육할 예정이다. 대학 교육 전반도 그에 맞춰 재편된다.
AI 전문가 양성을 위한 정부의 노력에 대학들은 관련 전공과정 개설로 화답하고 있다. 니혼게이자이(닛케이) 신문의 최근 보도를 보면, 사이타마대와 무사시노대·도쿄공과대 등 3개 대학은 내년 봄학기부터 AI 전공과정을 신설하기로 했다. 사이타마대는 새 전공 과정을 통해 ‘일본 딥러닝협회’의 전문가 자격 취득을 지원하기로 했다. 무사시노대는 1학년 때부터 교수의 지원을 받아 연구에 돌입할 수 있도록, 오는 2020년까지 교수 13명을 신규 채용할 계획이다. 도쿄공과대는 컴퓨터과학부 내 AI 전공 과정을 신설해 의료보건학부·응용생물학부 등 다른 전공과 교차 연구를 진행하며 다양한 분야의 AI 인재를 육성할 계획이다.
현재 AI 인재 확보와 양성에 가장 적극적인 곳이 중국이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은 지난해 10월 중앙정치국 집체학습에서 “AI는 신과학기술 혁명과 산업 변혁을 이끄는 전략 기술이자 전 분야를 끌어올리는 선도·분수 효과가 강력한 기술”이라며 “(14억 시장에서 발생하는) 거대한 데이터와 풍부한 시장 잠재력을 (AI 기술 발전의) 지렛대로 활용하겠다”고 선언했다.
이와 관련해 중국 교육부는 최근 35개 대학에 AI 학과를 신설한다고 발표했다. 여기에는 베이징이공대·통지대·저장대·난징대·상하이교통대·하얼빈공대 등이 포함된다. 중국 교육부는 이와 별개로 AI 관련 학과 신설을 허용해 현재까지 총 329개 대학이 관련 학과 개설을 허가받은 것으로 알려졌다. 그중 101개 대학은 ‘로봇 엔지니어링’ 학과, 203개 대학은 ‘데이터 과학과 빅데이터 기술’ 학과, 25개 대학은 ‘빅데이터 관리와 응용’ 학과를 각각 개설할 예정이다.
미국은 글로벌 ICT 기업인 구글·페이스북·아마존 등이 포진해 있고, AI 학습에 필요한 연산처리장치 제조 기업인 인텔·엔비디아·AMD 등이 관련 분야를 선도해 왔다. 하지만 중국이 가파르게 성장하면서 양국의 격차는 빠르게 좁혀지고 있다. 지난해 정보통신기술진흥센터(IITP)가 발표한 2017 ICT 기술 수준 조사 보고서를 보면, 중국은 AI 분야에서 미국과 기술 격차를 1.4년까지 따라잡았다. 다국적 회계 컨설팅 기업 프라이스워터하우스쿠퍼스(PwC)는 최근 보고서에서 앞으로 10년간 중국의 AI 기술이 7조달러(약 7846조원)의 가치를 생산하는 반면 미국을 포함한 북미 지역은 3조7000억달러(약 4150조원)를 만드는 데 그칠 것으로 전망했다. 현재는 미국이 중국을 앞서지만 10년 내에 중국이 미국을 뛰어넘을 것이라는 얘기다. 다급해진 미국은 2월 11일(현지시각) 트럼프 대통령이 나서 연방정부 모든 기관이 AI 연구·개발에 우선순위를 두도록 하는 내용의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AI 이니셔티브’로 명명된 이 행정명령은 연방정부가 차세대 AI 기술 우위를 확보하기 위한 기술 개발의 필요성과 이를 위한 중장기 연구 지원, AI 연구 증진을 위한 연방정부 정보 접근권 확대, 과학·기술·공학·수학 분야 교육 강화 등을 명시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서명식에서 “AI 분야에서 지속적인 리더십은 미국 경제와 국가 안보 유지에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미국과 이웃한 캐나다는 수년 전부터 캐나다에서 AI 관련 연구를 하는 기업·연구소에 투자 비용의 15%를 세액공제해 주는 등 AI 거점 도시로 자리매김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여기에 더해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반이민 정책의 반작용으로 미국 대신 캐나다를 선택하는 다국적 인재가 늘면서 ‘AI 강국’으로 급부상했다. AI 딥러닝 분야의 3대 석학으로 꼽히는 요슈아 벤지오 몬트리올대 교수와 얀 르쿤 페이스북 수석 AI 과학자, 제프리 힌튼 토론토대 명예교수가 모두 캐나다 출신이거나 캐나다에서 주요 연구를 진행(르쿤은 힌튼의 토론토대 박사과정 제자)했다.
유럽에서는 일찌감치 AI 연구에 뛰어든 독일이 앞서가고 있다. 독일은 이미 1988년 민관 공동으로 AI 연구소를 세웠다. 이후 마이크로소프트·아마존의 연구개발센터를 유치하면서 인재 확보를 서둘렀다. 그 결과 AI 인재 양성의 핵심인 전문 강사를 많이 배출할 수 있었다. 독일 정부는 관련 분야 전문가 육성을 위해 2025년까지 30억유로(약 3조8000억원)를 투입할 계획이다.
우리나라는 과학기술정보통신부 주도로 소프트웨어(SW)·빅데이터·클라우드까지 포함한 AI 인재 양성에 나서고 있다. 9월부터 KAIST·고려대·성균관대에 AI 대학원을 개설한다. KAIST는 AI 대학원을 2023년 이후 단과대 수준 인공지능대학(College of AI)으로 발전시킨다는 계획이다. 성균관대 AI 대학원은 현장 중심 AI 혁신 연구를 위해 삼성전자 등 39개 기업과 협업해 산업 중심 산학협력 체계를 강화할 예정이다. 고려대는 AI 분야 최고급 인재를 집중 양성하기 위해 박사과정(석·박사 통합 및 박사) 중심으로 운영한다.
프랑스 파리의 혁신적 SW 교육기관인 ‘에콜42’를 벤치마킹해 서울 개포동에 한국판 에콜42를 올해 9월 개원할 예정이다. 에콜42는 교사나 교재 없이 학생이 스스로 과제를 선정하고 팀을 꾸려 연구한다. 학비는 무료다. 취업 또는 창업하거나 목표했던 기술을 습득하면 과정을 마친다. 재학생들은 통상 3~5년간 150여 개의 프로젝트를 수행하게 된다.
“지금의 언어로 설명 어려운 시대 온다”
하지만 아직까지 우리나라의 AI 경쟁력은 미국·중국과 격차가 크다. 대학원과 학과 몇 개 개설하는 것으로 따라갈 수 있는 격차가 아니라는 것이 전문가들의 일치된 견해다. 전문가들은 AI 분야의 경쟁력 제고를 위해서는 문과와 이과를 엄격히 구분하는 현재의 학제를 손봐야 한다고 지적한다. 인간의 정체성과 무인 기술, 지속 가능한 발전 등 AI 기술을 통해 다뤄야 할 이슈가 점점 더 복잡해지고 있는 만큼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통섭형’ 인재 육성이 중요해졌기 때문이다. 세계적인 AI 연구가인 벤 괴르첼 싱귤래리티넷(SingularityNET) 창업자 겸 최고경영자(CEO)는 ‘이코노미조선’과 인터뷰에서 “지금의 언어로는 설명조차 어려운, 새로운 시대가 오고 있다”며 “특정한 기술이나 지식을 가르치기보다는 그것을 습득하는 방식을 전수하는 데 초점을 맞출 필요가 있다. 새로운 것을 창조하고 서로 다른 영역끼리 연결하는 능력도 가르쳐야 한다”고 조언했다.
싱귤래리티넷은 블록체인 기술 기반의 AI 오픈마켓이다. 괴르첼은 홍콩에 있는 로봇제조사 핸슨 로보틱스의 최고기술책임자(CTO)를 겸하고 있다. 핸슨 로보틱스는 지금까지 개발된 로봇 가운데 사람과 가장 유사하다는 평가를 받는 휴머노이드 ‘소피아’ 개발사다.
철학과 교수로서 AI의 윤리 문제를 오래 연구해온 데이비드 댄크스 카네기멜런대 교수는 조선일보 인터뷰에서 “IT 기업들이 기술의 윤리적 측면을 간과하다 문제를 일으키는 경우가 늘면서 철학·윤리 전공자에 대한 수요가 커지고 있다”며 “최대한 다양한 분야의 전문가가 다각도로 문제를 들여다보지 않고서는 엉뚱한 방향으로 기술이 치우칠 위험이 있다”고 경고했다.
plus point
국내 AI 연구의 버팀목 삼성전자
1980년대 이건희 당시 삼성전자 회장은 반도체를 미래 성장 동력으로 낙점하고, 관련 분야의 고급 인재들을 대거 영입했다. 30여 년이 지난 지금 삼성전자는 인텔을 제치고 세계 반도체 1위 기업으로 자리매김했다.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은 AI와 빅데이터, 로봇 등 4차 산업혁명 시대의 신성장 사업 육성을 위해 최고 인재를 영입하는 데 공을 들이고 있다. 이 같은 노력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 벌써 기대가 모인다.
삼성전자는 최근 AI 연구 역량 강화를 위해 위구연 미국 하버드대 전기공학·컴퓨터과학과 석좌교수를 ‘펠로’로 영입했다. 펠로는 삼성전자가 세계 최고 수준의 기술을 보유한 전문가나 석학에게 주는 연구 분야 최고직이다. 위 교수는 2013년 세계에서 가장 작은 비행 곤충 로봇인 로보비의 센서와 프로세서 등 핵심 기술을 개발한 AI 프로세서 부문 세계적 석학이다. 그는 삼성전자 AI 연구를 총괄하는 삼성리서치에 소속돼 인공신경망 기반 차세대 AI 프로세서를 연구하게 된다.
삼성전자는 이에 앞서 지난해 6월 AI 분야의 세계적 석학인 세바스찬 승 미국 프린스턴대 뇌과학연구소 컴퓨터공학과 교수와 다니엘 리 코넬대 전기공학과 교수를 부사장으로 영입한 바 있다.
하지만 중국이 막강한 자금력을 앞세워 AI 인재들의 몸값을 천정부지로 올려놓은 것은 걱정스러운 대목이다. 산업연구원 보고서와 중국 현지 매체 보도를 종합하면 2017년 기준 텐센트의 평균 임금은 77만8300위안(약 1억3100만원)으로 사상 처음으로 삼성전자 평균 임금(1억1700만원)을 앞질렀다. 2016년 60만400위안으로 삼성전자(1억700만원)를 턱밑까지 쫓아온 뒤 1년 사이 29%에 육박하는 기록적인 임금 상승률을 기록하며 삼성전자를 추월했다.
[더 나은 사회] 세계화와 로보틱스의 동시적 진행 볼드윈, ‘글로보틱스 격변’이라 정의 원격지능과 인공지능의 세상 그려내
글로벌 가치사슬도 변화 흐름 뚜렷 이제는 데이터 흐름이 세계화 주도
선진국 서비스 부문에 집중된 압력 과거 전환들과는 근본적 차이 보여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하면서 선진국 서비스 부문 일자리를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사진은 케이티(KT)가 인천공항에 설치한 무인 로봇카페 ‘비트’의 모습. 연합뉴스
#에밀리 드라이퍼스는 미국의 정보기술 전문지 <와이어드> 기자다. 동부 보스턴 주재기자인 에밀리는 서부 샌프란시스코에 자리 잡은 본사 편집국의 회의에 늘 ‘참석’한다. 영상통화? 천만에. 비밀은 가상현실 기술을 적용해 원격 현장감(telepresence)을 높인 로봇에 있다. 편집국을 돌아다니는 로봇을 조종하는 건 6천㎞ 이상 떨어진 보스턴의 에밀리다. #‘코인’(COIN). ‘계약지능’(Contract Intelligence)의 줄임말인 코인은 투자은행 제이피모건이 2016년 말 ‘채용’한 비서다. 인공지능 소프트웨어를 탑재한 이 똑똑한 비서는 예전엔 회사의 수많은 고학력 동료들이 연 36만시간을 들여 처리하던 자료 검색 및 처리 업무를 단 몇초 만에 해치운다. 원격지능(RI·Remote Intelligence)과 인공지능(AI)을 각각 상징하는 두 이야기는 일터에서 진행 중인 디지털 전환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사례다. ‘지금, 거기(에도) 있음’이 특징인 원격지능의 시대에 물리적 거리는 의미를 잃기 마련이다. 나날이 발전하는 인공지능 기술은 전문서비스직 일터를 꿰찬 화이트칼라 로봇의 다른 얼굴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세계화. 세계화가 인공지능을 만났을 때, 세계 경제는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 일자리 지도는 어떻게 바뀔까?
‘건당 고용 모델’ 자리 잡나스위스 제네바의 국제개발연구원(IHEID) 교수인 리처드 볼드윈이 최근 출간한 <글로보틱스 격변>은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볼드윈은 세계화와 자동화 두 변수의 조합에 따라 끊임없이 변해온 세계 경제 질서가 최근 또 한번의 격변을 경험하는 중이라며, 이를 ‘글로보틱스’로 정의했다. 세계화(글로벌라이제이션)와 로보틱스(로봇공학)를 합친 단어다. 볼드윈이 눈여겨보는 대목은 작업 방식의 변화다. 정보통신기술(ICT) 발전에 따라 선진국의 제조업 일자리뿐 아니라 일부 서비스 부문 일자리가 개발도상국으로 옮겨간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콜센터 일자리가 대표적. 하지만 현실의 행보는 저만치 앞서나가고 있다. 대표적인 프리랜서 일자리 연결 플랫폼인 ‘업워크’(Upwork)를 예로 들어보자. 지원자(노동력 제공자)가 세계 어느 곳에 있든지 간에 플랫폼을 통해 간단한 절차를 거쳐 엔터키만 누르면 계약이 성사된다. 태스크래빗(TaskRabbit) 파이버(Fiverr) 크레이그리스트(Craiglist) 피플퍼아워(PeoplePerHour) 프리랜서닷컴(Freelancer.com) 등 일자리 연결 플랫폼은 차고 넘친다. 건당 유료시청(pay-per-view) 모델에 비견되는 ‘건당 고용 모델’인 셈이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연구팀이 실태조사를 해보니, 이들 플랫폼을 통해 일자리를 얻는 노동자 가운데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 출신은 8분의 1에 그쳤다. 언어 장벽을 무너뜨리는 기계번역 기술과 원격 현장감 기술의 발전은 이런 흐름에 날개를 달아준다. 볼드윈은 이런 현상이 선진국의 저임금 서비스 일자리 일부를 아웃소싱하거나 개도국의 노동력이 일자리를 찾아 선진국으로 밀려들던 과거의 양상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강조한다. 개도국 노동력이 선진국의 사무실 안으로 ‘일시적으로’ 이민해오는 것과 마찬가지인 까닭이다. 물리적 공간을 이동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원격이민’(telemigration)이라 이름 붙인 배경이다.
영국의 브렉시트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당선의 밑바탕엔 노동시장의 구조 변화에 대한 영국과 미국 노동자들의 불만이 깔려 있다는 지적이 많다. 사진은 지난 1월 런던 중심가에서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는 모습. 런던/로이터 연합뉴스
지식서비스 산업 ‘교역 집약도’ 높아져약 250년 전 산업혁명의 불길이 처음 댕겨진 이래 세계 경제는 몇차례 커다란 전환을 경험했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글로보틱스 격변이 과거의 전환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볼드윈은 서비스 부문과 직결돼 있고, 세계화와 자동화가 동시에 진행돼 충격을 증폭시킨다는 점에 주목한다. 기술 발전의 충격을 흡수할 공간을 더는 남겨두지 않는 방향으로 몰아치고 있다는 얘기다. 산업혁명 이래 20세기 중반까지 장구한 세월 동안(‘거대한 전환’) 끊임없이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를 만들어냈거나, 1970년대 무렵부터 본격화한 또 다른 전환(‘서비스 전환’)에서 선진국의 서비스 부문이 격변의 압력으로부터 한발 물러서 있던 것과는 분명 대비된다. 이런 엄연한 현실은 세계화에 대한 우리의 낯익은 생각마저 뒤흔들고 있다. 세계화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어서다. 세계화의 최신 해부도가 증명한다. 매킨지글로벌연구소가 올해 초 발표한 ‘이행기의 세계화’ 보고서를 보면, 2000~2017년에 글로벌 가치사슬 구조는 더욱 지식집약적인 색채로 탈바꿈한 것으로 나타났다. 매킨지글로벌연구소는 43개국 23개 산업을 크게 6개 유형으로 나눠 산업별 글로벌 가치사슬의 변화를 분석했다. 6개 유형은 △글로벌 혁신형(화학·자동차·컴퓨터/전자 등) △노동집약적 재화형(섬유·가구 등) △지역공정형(식음료·제지/인쇄·유리/세라믹 등) △자원집약적 재화형(농업·광업·에너지 등) △노동집약적 서비스형(도소매·운송/창고 등) △지식집약적 서비스형(전문직·금융·IT서비스 등)이다. 보고서를 보면, 산업별 전체 생산 대비 수출 비중을 뜻하는 교역 집약도가 2007년 이후 거의 모든 산업 유형에서 낮아졌다. 이와는 달리 아이티서비스와 전문서비스직 등 지식집약적 서비스형 산업에서의 교역 집약도는 높아졌다.
미국 정보기술 전문지 ‘와이어드’ 본사 건물 안을 로봇 ‘엠봇’이 돌아다니고 있다. 엠봇은 가상현실 기술을 적용해 원격 현장감을 높인 로봇이다. 인스타그램 갈무리
세계 경제 ‘거대한 수렴’ 계속될까실제로 전 세계 총생산(GDP) 대비 재화·서비스 및 금융의 글로벌 이동 규모 비중은 2014년 39%로, 2007년(53%) 정점을 찍은 뒤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대신 그동안 주목받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글로벌 흐름이 빈자리를 빠르게 꿰찼다. 전자상거래·검색·동영상 등의 얼굴을 한 데이터(지식정보)의 흐름이 주인공이다. 2005~2014년 10년 사이 데이터의 글로벌 이동 규모는 45배나 급증했다. 21세기 초반까지 세계화의 전형적 양상이던 재화·서비스 및 금융의 이동과는 다른,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도 같은’ 지식정보의 세계화가 거침없이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디지털 세계화’가 불러올 파장. 볼드윈이 말한 세계 경제의 ‘거대한 수렴’(great convergence)이 계속될지 여부가 관건이다. 단순하게 말해 세계화는 여러 비용의 함수다. 재화를 멀리 옮기는 운송 비용이 낮아지면서 세계화는 시작됐다. 하지만 제조과정에 드는 ‘커뮤니케이션 비용’은 산업화에 앞선 나라들에서 이뤄진 기술 혁신의 열매가 그들 나라 내부(제조업)에만 머물게끔 했다. 대략 1820~1990년 사이 세계 경제가 선진국과 개도국의 격차가 벌어지는 ‘거대한 분기’(divergence·발산)를 경험한 배경이다. 20세기 중후반 정보통신기술의 비약적 발전은 정반대의 흐름을 낳았다. ‘아이디어(노하우) 이동 비용’이 낮아지자 선진국의 제조공정은 개도국으로 하나둘씩 옮겨갔다. 전 세계 제조업 생산에서 주요 7개국(G7)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 65%에서 2014년엔 47%로 낮아졌다. 선진국과 신흥 시장의 수렴이 나타난 것이다. 앞으로 인공지능과 원격 현장감 기술 등이 꾸준히 발전하며 ‘대면(face-to-face) 비용’까지 급속도로 떨어뜨린다면? 현재의 수렴 현상이 이어질 가능성에 일단 무게가 실린다. 이 과정에서 선진국 등 산업화에서 앞선 나라들의 혼돈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금융위기 이후 미국 정보산업 부문 일자리 추이는 시사하는 바 크다. 퇴직과 해고 등 일자리를 떠난 이직자 수를 전체 일자리 수로 나눈 ‘이직률’은 높아진 데 반해, 신규 채용과 배치전환 등 입직자 수를 전체 일자리 수로 나눈 ‘입직률’은 2015년을 정점으로 빠르게 낮아지는 중이다. 질 좋은 일자리가 ‘어딘가’로 증발했음을 알 수 있다. 과연 어디로?
리처드 볼드윈 스위스 제네바 국제개발연구원(IHEID) 교수가 최근 펴낸 <글로보틱스 격변>.
혼돈의 밑바탕엔 일시적 ‘피난 심리’시곗바늘을 잠시 되돌려보자. 19세기 중반 수백만명의 일자리를 위협한 건 무인 자율주행 자동차가 아니라 인간이 운전하는 첨단 ‘탈것’이었다. 마부들의 거센 저항을 누그러뜨리고자 영국에선 특이한 조례가 잠시 존재했다. 증기기관이나 동물 이외의 동력원으로 움직이는 차량의 경우, 최소한 3명을 반드시 고용해야 한다는 게 뼈대. 특히 이 중 한명에게는 차량보다 60야드(약 55m) 앞서 붉은 깃발을 들고 걸어가면서 경고 신호를 주는 역할을 맡겼다. 바로 1865년의 ‘붉은 깃발 조례’다. 이 조례대로라면 차량의 최고 제한속도는 시속 3.2㎞(!)였다. 기술과 혁신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종종 거론된다. 과연 글로보틱스 격변에선 어떨까? 격변의 파고에 가장 크게 노출된 건 수억명에 이르는 선진국의 서비스 노동자다. 특히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지 않는 금융·아이티·물류 부문 등은 직격탄을 피하기 어렵다. 볼드윈이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의 ‘뒤섞임’(fusion) 가능성을 조심스레 점치는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제조업에서 서비스 부문으로 일자리의 무게중심이 옮겨가면서 블루칼라 일자리가 집중 타격을 받았다면, 이젠 화이트칼라 일자리마저 흔들리고 있어서다.
물리적 장벽조차 세울 수 없는 원격이민자와 인공지능의 거센 물결. “기술 발전을 거부하지는 않으나 일시적으로나마 도피하고 싶은” 일종의 ‘피난 심리’(그가 ‘shelterism’이라 표현한 현상의 알맹이다)가 퍼져가는 상황에선 출구를 찾지 못한, 방향을 잃은 ‘분노의 연대’만이 근육을 키우기 십상이다. 글로보틱스 격변은 이제 겨우 시작됐을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