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 ‘이비에스국제다큐영화제(EIDF) 2021’이 23일 밤 9시50분 개막작 <최초의 만찬>을 시작으로 열여덟번째 여정에 들어갔다. 스위스, 캐나다, 한국 등 전세계 29개국에서 64편을 출품했다. 코로나19 사태 장기화 악재 속에서도 지난해(30개국 69편)와 규모가 비슷하다.이아이디에프는 티브이(TV) 방송과 극장에서 동시 진행하는 세계 유일의 다큐 영화제다. 2004년 시작해 시대정신과 도전의식이 돋보이는 국내외 우수 작품들을 꾸준히 선보여왔다. 올해는 티브이에서 23~29일 종일 방영하고, 극장 상영은 코로나19로 이전보다 축소해 메가박스 일산벨라시타에서만 27~29일 사흘간 선보인다. 자세한 편성은 공식 누리집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비에스국제다큐영화제.
‘다큐는 현실의 반영’이라는 명제는 2021년에도 관통한다. 출품작마다 소재는 달라도 인간의 행복과 존엄성은 지켜져야 하고 우리는 행복해야 한다는 의미는 변함없다.<슈퍼 에이블>(티브이 24일 오후 2시30분)은 ‘2020 도쿄패럴림픽’을 준비하는 필리핀 장애인 선수 마리테스를 조명하며 사는 것의 의미를 들여다본다. 코로나19 사태와 맞닥뜨린 상황에서도 운동을 동력 삼아 행복한 삶을 일궈나가는 그의 모습에서 현실의 우리를 돌아보게 한다.
‘미투’ 운동은 수년 전부터 시대 화두였다. <너의 이야기>(티브이 23일 오후 1시45분)는 아직 끝난 이야기가 아니라고 말한다. 4년 전 영화 오디션에 참가했던 이들은 조직적인 성적 학대와 폭력의 피해자였다. 가해자인 감독은 당시 오디션에서 찍은 내용물을 편집해 새로운 영화를 제작하는 등 참가자들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가해자들이 어떤 짓을 했고, 그 사건이 현재 그들의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는지를 다큐에 담았다.
<미래의 아이들에게>(티브이 26일 오후 1시45분, 극장 29일 오후 2시50분)는 시대를 연결하는 구실에 충실하다. 칠레의 사회 정의를 촉구하는 레이엔, 홍콩 민주화를 부르짖는 페퍼, 기후변화가 우간다에 초래하는 끔찍한 대가에 저항하는 힐다까지, 세계 도처에서 시민들의 시위가 고조되는 지금 거대한 정치적 움직임의 한복판에 서 있는 새로운 세대를 이야기한다.
<네메시스>
스위스 취리히의 유서 깊은 기차역이 철거되고 그 자리에 교도소와 치안센터가 건축되는 과정을 담은 <네메시스>(티브이 24일 낮 12시10분, 극장 27일 낮 1시)도 흥미롭다. 감독은 집 창문에서 35㎜ 카메라로 7년간 자유로운 이동을 보장하던 철로의 확장성이 통제와 감금이라는 집약적 공간으로 변화하는 과정을 촬영했다. 1980년대 지어진 봉명동 주공아파트의 모습을 담은 <봉명주공>(티브이 24일 밤 9시50분)은 그 시절에 대한 그리움을 부른다.
인생 최고의 날로 기억될 멋진 결혼식이 열리는 팜스프링스의 리조트 타임루프 세계관에 갇힌 남자 나일스에게 오늘은 100만 번째(?) 결혼식일 뿐이다. 하지만 우연한 사고로 세라가 나일스의 세상에 개입하면서 똑같았던 하루는 늘 특별한 오늘(!)이 되는데… 진짜 내일 없이 사는, 두 남녀의 썸머 코믹 로맨스가 시작된다!
죽어서라도 벗어나고 싶던 그날이, 이젠 계속되면 좋겠다
영화 <팜 스프링스>의 두 남녀 주인공은 휴양지에서 ‘11월9일’을 무한 반복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그린나래미디어 제공
살면서 가장 행복했던 날이라고 해도 “100만번씩” 되풀이하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영화 <팜 스프링스>의 주인공 나일스(앤디 샘버그)는 유쾌할 것 하나 없는 어느 11월9일에 갇혀버렸다. 미국의 아름다운 휴양지 ‘팜 스프링스’에서 열리는 한 결혼식 날이다. 화창한 날씨에 신랑·신부는 충분히 행복해 보이지만 나일스에게는 뜯어볼수록 별로인 하루다. 결혼식은 적당히 지루하고, 여자친구는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 같다. 게다가 이 24시간 단위의 타임루프는 무슨 방법을 써도 벗어날 수가 없다. 다양한 방법으로 죽어도 봤지만 눈을 뜨면 결국 똑같은 침대 위에서의 아침이다. 나일스는 모든 걸 체념한 채 ‘죽지 못해서’ 살아갈 뿐이다.
그런 그의 시간에 갑자기 세라(크리스틴 밀리오티)가 들어온다. 이제 반복되는 하루는 나일스만의 것이 아니다. 세라에게도 11월9일은 영 달갑지 않은 하루인 것처럼 보인다. 신부의 언니인 그는 사랑하는 동생이 결혼하는데도 별로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거기에 나일스와 같은 처지가 되어버리기까지 했으니 불행은 2인분이 됐다. 이왕 이렇게 된 거, 둘은 정말로 ‘내일이 없는 것처럼’ 놀아보기로 한다. ‘19금’ 타투 새기기, 경비행기 훔쳐 타다가 추락해서 죽어보기, 결혼식 들러리 골탕먹이기, 웨딩 케이크 안에 폭탄 심기…. 나일스는 지독한 권태일 뿐이었던 하루의 시작이 처음으로 기대된다. 세라도 즐겁기는 마찬가지다. 두 사람은 매일 아침 웃으면서 눈뜨기 시작하고, 서로만이 공유하는 타임루프 세계관 속에서 점점 가까워진다.
그렇게 행복하게 오래오래 살았다는 결말일 리는 없다. 어떤 이유에서인지 11월9일은 세라에게 다시는 깨어나고 싶지 않은 날이 되어버렸다. 그런 가운데 두 사람 앞에 기적적으로 탈출의 가능성이 열린다. 그 앞에서 나일스는 세라와 영원히 이 세계에 주저앉고 싶다는 말을 한다.
한시라도 빨리 떠나고 싶은 세라, 그런 그에게 도전일랑 말고 여기서 계속 함께 지내자는 나일스. 두 사람은 같은 길을 선택할까? 각자의 선택에 후회는 없을까? 무엇보다, 세라와 나일스는 행복할 수 있을까?
<팜 스프링스>의 장점은 너무 무겁지도, 가볍지도 않은 적당한 무게에 있다. 영화 <위플래시>에서 살 떨리는 독설가 ‘플레처’였던 J K 시먼스가 다시 악역으로 등장하며 관객을 긴장시키지만 알고 보면 사랑스러운 악당이다. 타임루프 세계관에서 철학적 질문거리를 찾을 수도 있지만 영화는 똑똑한 재치로 관객이 즐기기에 딱 알맞은 무게를 유지한다. 코로나19의 타임루프에 갇혀버린 것처럼 답답한 일상이다. 영화를 보는 동안은 휴양지에서의 맥주 한잔 같은 기분 좋은 청량함을 느낄 수 있다.
<팜 스프링스>는 올해 골든글로브 뮤지컬·코미디 부문 최우수 작품상과 남우주연상 후보에 올랐고, 크리틱스초이스어워드에서는 베스트 코미디상을 받았다. 미국 온라인 동영상 서비스(OTT) 훌루에서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을 뛰어넘는 스트리밍 기록을 세웠다. 훌루와 배급사 네온에 2250만달러(약 260억원)에 판매되며 2020년 선댄스 영화제 사상 최고 판매가 기록을 세웠다. 맥스 바바코우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19일 개봉했다.
인간이 초래한 팬데믹과 열돔 현상 지독히도 이기적인 인간 향한 분노 파국 초래한 자 책임 못 묻는 ‘랑종’ 비판하되 혐오하지 않는 ‘블랙 위도우’
<랑종> 스틸컷. 쇼박스 제공
열돔이 한반도를 덮었다. 끈적끈적한 더위 속에서 미래에 대한 낙관도 조금씩 말라 간다. 와중에 두 편의 영화가 코로나로 숨 죽은 극장가에 활기를 불어넣어주고 있다. 무당이 악령과 싸우는 오컬트물 <랑종>과 강화 인간이 악당을 응징하는 액션물 <블랙 위도우>다. 장르도, 프로덕션 규모도, 목표 관객층도 다른 두 작품이지만 오늘은 함께 이야기해보고 싶다. 한자리에 놓고 보면 지금/여기의 비관을 달래줄 소소한 위안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작은 것들에게 폭력 가하는 ‘랑종’ : The Medium , 2021 제작
요약 : 한국 외 | 공포 외 | 2021.07.14 개봉 | 청소년관람불가 | 131분
감독 : 반종 피산다나쿤
출연 : 나릴야 군몽콘켓, 싸와니 우툼마, 씨라니 얀키띠칸, 야사카 차이쏜 외
< 곡성>의 나홍진이 원안을 쓰고 제작을 맡아 개봉 전부터 화제였던 <랑종>은 타이 이산 지방의 시골 마을을 무대로 한다. 한 다큐팀이 랑종(무당)에 관한 작품을 만들면서 이 지역에서 대대로 ‘바얀’ 신을 모시고 있는 랑종 님(사와니 우툼마)을 촬영하고 있다. 그러던 중 님의 조카 밍(나릴야 군몽콘켓)의 기이한 행동을 목격한다. 바얀 신이 밍으로 옮겨가는 것이라 판단한 다큐팀은 접신의 순간을 포착하기 위해 밍을 밀착취재하기 시작하고, 밍은 점점 음란하고 흉포한 ‘짐승’이 되어간다.
곧 진실이 드러난다. 밍에게 들린 것은 생명을 돌보는 신 바얀이 아니라, 인간이 해친 모든 것들의 원혼이다. 노동자와 빈민, 개, 돼지, 지네… 밍의 몸속엔 이 모든 것이 얽혀 있다. 밍의 젊은 신체는 온갖 상스러운 것들, 불길한 것들, 더러운 것들이 스며드는 텅 빈 그릇이다. 그 그릇이 쉽게 열릴 수 있었던 건 그가 남동생과 근친상간의 죄를 저질렀기 때문이다. 악령이 소녀의 몸을 강탈하는 엑소시즘 영화들의 장르관습이 그러하듯, <랑종>에서도 가부장제의 규범을 어긴 여성은 악귀 들린 ‘잡년’으로 낙인찍혀 괴물이 된다.
밍이 원혼들에게 잠식되어가는 동안, 님은 퇴마사와 함께 구마의식을 준비한다. 어떻게든 조카를 구하겠다는 님의 선한 의지와 어떻게든 인간을 짓이겨버리겠다는 비천한 것들의 악한 의지가 대결하면서 영화는 서서히 절정을 향해 고양된다. 이 싸움은 어떻게 될까? 우리가 이미 <곡성>에서 확인했던 것처럼 나홍진의 영화세계에서 아무것도 믿지 못하는 인간은 악한 존재를 이길 수 없다. 의심이 님의 선한 의지를 꺾어버리는 순간, 영화는 완전한 파국으로 치닫는다. 영화는 원안자 나홍진의 영화세계를 정확하게 계승하고 있다.
물론 <랑종>에도 독창적인 순간이 있다. 반쫑 피산타나꾼(반종 피산다나쿤) 감독은 타이의 무속신앙을 진지하게 탐구하면서 <곡성>과는 다른 음험함을 만들어냈다. 특히 영화에서 밍과 합체되는 것이 셀 수 없이 많은, 이름 없는 것들이라는 점은 인상적이다. 짓밟히고 버려진 추추원혼들이 매개자를 만나 파괴력을 얻고 반격을 시작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빙의된 밍은 마블 시네마틱 유니버스(MCU·엠시유) ‘인피니티 사가’의 마지막을 장식했던 파시스트 생태주의자 타노스의 덜 우아하고 다소 국지적인 판본일지도 모른다. 타노스는 우주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인피니티 건틀릿을 찬 손가락을 튕겨 우주를 가득 채운 지적 생명체의 절반을 가루로 만들어버렸다.
인간이 초래한 팬데믹과 열돔의 한가운데에서 만난 밍과 타노스의 분노는 일견 설득력 있다. 절멸하라, 너. 지독히도 이기적인 인간이여. 그러나 이런 반인간적인 태도가 대안이 될 순 없다. 타노스의 공명정대한 손가락과 달리, 현실에서 재난은 약한 고리부터 타격하고, 고통은 정의롭게 분배되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절멸의 상상력은 파국적 상황을 초래한 이들의 책임을 제대로 묻지 못한다. 결국 이것이 <랑종>이 빠진 함정이기도 하다. 영화는 인간이 해친 것들의 고통을 상상하지만, 정작 스스로도 그 작은 것들에게 폭력을 가한다. 타이에서 가장 빈곤한 지역으로 노동자와 빈민들이 착취당했던 이산 지역의 역사적 맥락을 “자본가였던 밍의 부계 조상들의 업보”라는 수사로 뭉개버리면서, 영화는 여성 신체와 비인간 동물은 물론, 이산 지역 역시 문명 이전의 원초적이고 이국적인 이미지 안에서 착취한다.
‘블랙 위도우’, 작은 것들의 봉기 : Black Widow , 2021 제작
요약 : 미국 | 액션 외 | 2021.07.07 개봉 | 12세이상 관람가 | 134분
감독 : 케이트 쇼트랜드
출연 : 스칼렛 요한슨, 플로렌스 퓨, 레이첼 와이즈, 데이비드 하버 외
<블랙 위도우> 스틸컷. 월트디즈니컴퍼니코리아 제공
그래서 <랑종>에 대한 고민은 <블랙 위도우>에 대한 생각으로 이어졌다. 잘 알려져 있는 것처럼 영화의 주인공 블랙 위도우(스칼릿 조핸슨)는 이미 2년 전 <어벤져스: 엔드게임>(2019)에서 사망했다. 그는 타노스가 날려버린 우주의 절반을 되살리기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숨을 절벽 아래로 내던졌다. 이미 죽은 블랙 위도우를 솔로 시리즈로 잠시나마 되살릴 수 있었던 건 페미니즘 제4물결과 함께 할리우드를 강력하게 사로잡고 있는 페미니스트 상상력 덕분이었다. <블랙 위도우>의 배우이자 제작자인 스칼릿 조핸슨은 엠시유가 블랙 위도우를 성적으로 대상화해왔던 역사를 비판하면서 지금까지와는 다른 서사와 이미지의 탄생을 알렸다.
그렇게 부활한 블랙 위도우는 타노스가 그려놓은 파국의 시간을 거슬러 자신이 죽기 전으로 돌아간다. 그리고 자신과 마찬가지로 아주 어린 나이에 구소련의 테러집단인 ‘레드룸’에 납치당해 세뇌와 가혹한 훈련 과정을 거쳐 킬러로 성장한 수많은 위도우를 해방시킨다. ‘작은 것들’의 봉기가 스크린 위에서 펼쳐지는 것이다. 케이트 쇼틀랜드 감독은 이 작품에서 “피해자가 아니라 생존자를 그리고자 했다”고 말했다. ‘인간의 일’을 비판하되 인간 자체를 혐오하지 않으려는 태도는 파국적 상황 속에서도 ‘생존’을 말하는 용기로 이어진다. 이 작품을 흥미롭게 만드는 페미니스트 상상력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렇다고 영화가 섣부른 낙관을 주장하는 건 아니다. 어쨌거나 블랙 위도우는 지금, 무덤 속에 누워 있으니까. 다만 영화는 말한다. 우리는 여전히 노력하고 있고, 나의 노력의 시간이 다했을 땐, 나의 동료들이 이어서 노력할 것이라고. 사실 <랑종>의 님은 스스로의 힘을 의심하면서도 밍을 위해 끝까지 싸우고자 했었다. 영화 속 페이크 다큐가 그 분투를 기억하려고 했다면 어땠을까. 그게 사실 현실에 더 가깝지 않은가. 그게 사실, 더 무섭고, 그러나 더 힘이 되지 않는가.영화평론가, <당신이 그린 우주를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