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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0년 : 세계가 처음 연결되었을 때  / 발레리 한센

909 H249yKㅇ  사회과학열람실(3층)  

 

책소개

 

기원후 1000년, 최초의 세계화가 시작되다

우리는 유럽인들이 희망봉을 돌고 아메리카로 향한 15세기 후반에 비로소 세계가 연결되었다고 믿는다. 또한 세계화를 20세기에 시작된 현상으로 이해하려는 경향이 있다. 하지만 과연 그럴까?

지난 30년간 중국사와 세계사, 문명 교류사를 연구해 온 저명한 역사가 발레리 한센(예일 대학 교수)은 요나라와 송나라가 맺은 전연의 맹, 카라한 왕조의 호탄 정복, 바이킹의 아메리카 상륙 등 같은 시기에 일어났지만 아무런 연관이 없어 보이는 사건들에서 공통된 흐름을 포착한다. 그리고 그 팽창의 배후에는 기원후 1000년 무렵에 일어난 최초의 세계화가 있다고 주장한다. 전염병의 대유행과 전쟁으로 이제 세계화는 끝났다는 목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것은 위기일까? 대관절 세계화란 무엇일까? 이러한 문제 제기 속에서 이번에 출간되는 『1000년』은 세계화란 무엇인지 정의하고 그 기원을 추적한다. 또한 오늘날의 세계가 1000년의 세계로부터 탄생했다는 대담하고 획기적인 해석을 제시한다.

발레리 한센이 보여 주는 1000년 무렵의 삶은 21세기의 삶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오늘날 종교 신자의 92퍼센트는 1000년 무렵에 확립된 4대 종교(이슬람, 기독교, 힌두교, 불교) 중 한 가지를 믿는다. 세계화가 기술의 확산, 전통의 상실을 불러왔다는 점도 같다. 카이로와 콘스탄티노플, 광저우에서는 분노한 군중이 최초의 반(反)세계화 폭동을 일으켜 외국인들을 공격했다. 우리는 1000년의 세계화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저자는 생소한 환경에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최선인지를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다짜고짜 현지인을 살해한 바이킹보다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참을성 있게 우호 관계를 쌓은 사람들이 미지의 먼 땅에서도 성공했다. 물론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소함에 개방적인 사람들이 새것이라면 무조건 손사래를 친 사람들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얻어 낸 것은 분명하다. 그것이 1000년 무렵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진실

 

출판사 서평

 

1000년의 세계화와 오늘날의 세계화

발레리 한센이 보여 주는 1000년 무렵의 삶은 21세기의 삶과 놀라울 정도로 닮았다. 오늘날 종교 신자의 92퍼센트는 1000년 무렵에 확립된 4대 종교(이슬람, 기독교, 힌두교, 불교) 중 한 가지를 믿는다. 세계화가 기술의 확산, 전통의 상실을 불러왔다는 점도 같다. 카이로와 콘스탄티노플, 광저우에서는 분노한 군중이 최초의 반(反)세계화 폭동을 일으켜 외국인들을 공격했다.
우리는 1000년의 세계화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저자는 생소한 환경에 맞닥뜨렸을 때 어떻게 반응하는 것이 최선인지를 배울 수 있다고 말한다. 다짜고짜 현지인을 살해한 바이킹보다는 새로운 언어를 배우고 참을성 있게 우호 관계를 쌓은 사람들이 미지의 먼 땅에서도 성공했다. 물론 모두가 그랬던 것은 아니다. 그러나 생소함에 개방적인 사람들이 새것이라면 무조건 손사래를 친 사람들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얻어 낸 것은 분명하다. 그것이 1000년 무렵이나 지금이나 변하지 않는 진실이다.

『1000년』이 던지는 질문들

기존의 역사와는 다른 새로운 시각으로 이야기를 보완하고 구성해 내는 것으로 잘 알려진 발레리 한센은 『1000년』을 통해 다음과 같은 질문들을 던진다. 바이킹은 어떻게 500년이나 앞서 신대륙에 도착했을까? 가톨릭, 유대교, 이슬람, 정교회…… 러시아는 어떤 선택을 했을까? 거란 황제가 아프가니스탄의 술탄에게 선물을 보낸 이유는 무엇일까? 마야 신전의 벽화에 묘사된 금발 포로들은 누구일까? 말리의 만사 무사를 세계 최고의 부자로 만든 비밀은?
큰 연관이 없어 보이는 이 질문들이 이 책 『1000년』에서는 연결된다. 1000년의 세계화는 한 지역에서 벌어진 일이 멀리 떨어진 다른 지역들에까지 심대한 영향을 끼치게 했다. 오늘날의 세계화가 그런 것처럼 말이다. 이 책에서 눈여겨봐야 할 대목과 포인트를 몇 가지 짚자면 다음과 같다.

- 1000년 전에 결정된 신장 위구르와 러시아의 운명
10세기에 이르러 중앙아시아의 튀르크계 부족들은 이슬람으로 개종하기 시작했다. 카라한 왕조도 그중 하나였다. 개종한 지는 얼마 되지 않았지만 종교적 열정이 넘쳤던 카라한 왕조는 1006년에 오랜 경쟁자였던 동쪽의 불교 왕국 호탄을 정복했다. 이 사건은 별것 아닌 것처럼 보이지만, 지금의 신장 위구르 지역이 이슬람화하는 출발점이었다.
같은 시기에 동유럽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루스인들의 지도자 블라디미르 1세는 전통 신앙을 대신할 적절한 종교를 찾고 있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네 가지 종교가 후보군에 올랐다. 유대교, 이슬람, 로마가톨릭, 동방정교회였다.
블라디미르 1세는 정교회를 선택했다. 동시대인들에게 이 선택은 주목할 만한 일이 아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루스인들의 개종은 기독교 역사의 중요한 이정표였다. 오늘날 유럽이 정교회 영역과 가톨릭 영역으로 나뉜 일은 그 결과 중 하나다.

- 거란 황제가 아프가니스탄의 술탄에게 선물을 보내다
1026년, 요나라 사절이 선물을 들고 가즈나 왕조의 궁정에 도착했다. 지금의 아프가니스탄을 지배하던 가즈나 왕조도 튀르크계 이슬람 국가였다. 우호 관계를 수립하자는 요나라 황제의 요청에 가즈나 왕조의 군주인 술탄 마흐무드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두 나라 사이에 가로놓인 거리야말로 상대방의 속임수로부터 서로를 지킬 수 있는 보호막입니다. 가즈나는 요나라와 밀접하게 관계 맺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귀하가 이슬람교를 받아들일 때까지는.”
잔인할 정도로 현실적이고 솔직한 태도였다. 종교가 1000년의 세계를 가르는 경계선이라는 인식도 보인다. 요나라를 세운 거란족은 불교도들이었다. 거란족과 튀르크족은 유목 민족이라는 점에서는 같았지만, 종교가 이들의 정체성을 구분했다.
1000년 무렵, 전 세계의 왕국들은 앞다투어 주요 종교로 개종했다. 이제 사람들은 기존의 지역이나 혈통 외에 새로운 정체성을 보유하게 되었다. 바로 종교다. 가즈나 왕조의 마흐무드가 그랬듯이 사람들은 자기를 종교 블록의 일원으로 생각하기 시작했다. 세계화의 핵심 단계로 진입한 것이다.

- 발트해의 호박이 요나라 공주의 무덤에서 나오다
1005년, 요나라와 송나라의 협상단이 중국 황허강(황하) 유역의 도시 전연에서 만났다. 전연 부근까지 진출한 요나라 대군이 바로 남쪽에 있는 송의 수도 카이펑(개봉)을 위협하는 상황에서였다. 협상 결과, 송나라는 매년 비단 20만 필과 은 10만 냥을 요나라에 보내는 조건으로 평화를 얻었다.
요나라 황제의 손녀였던 진국공주가 1018년에 사망했을 때, 온갖 화려한 물건이 공주와 함께 묻혔다. 유리 용기와 황동 그릇은 시리아와 이집트, 이란에서 만들어진 것들이었다. 수정으로 만든 소품은 수마트라와 인도에서 온 것들이었다. 특히 눈에 띄는 것은 호박(琥珀)으로 만든 장식품들이었다. 재료인 호박 원석이 ‘슬라브인의 바다’, 즉 발트해에서 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진국공주의 묘에서 나온 부장품은 전연의 맹 이후에 요나라가 누린 번영을 생생하게 드러낸다. 동시에 1000년의 세계가 얼마나 세계화되어 있었는지도 보여 준다. 북유럽의 발트해와 중국 북쪽의 요나라 궁정 사이의 거리는 무려 6500킬로미터가 넘었다. 호박 유통로는 1000년의 세계에서 가장 긴 육로 중 하나였다.

- 중국의 도기가 이슬람 도공들을 위협하다
1000년 무렵에 상인들의 주요 고객은 서쪽이 아닌 동쪽에 있었다. 특히 송나라는 ‘지구상에서 가장 세계화된 지역’이었다. 요나라에 바치는 적지 않은 세폐조차도 송나라의 풍요로움에 아무런 그림자를 드리우지 못했다. 국제무역항인 광저우(광주)와 취안저우(천주)에서는 전 세계에서 온 상인들이 온갖 상품을 거래했다. 일본의 고전소설 『겐지 이야기』에서 주인공들이 피우는 향도 이렇게 들어온 수입품이었다.
최초의 세계화는 각지에서 삶의 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수렵과 채집으로 생활하던 동남아시아의 토착민들은 이제 중국 고객들을 위해 향신료를 재배했다. 중국인들도 상품을 생산했다. 12세기에서 13세기 사이에 이르면 푸젠성(복건성) 인구의 7.5퍼센트가량이 수출용 도자기 생산업에 종사할 정도였다.
광저우에서 페르시아만의 바스라 항구까지 이어지는 해로는 그 길이가 약 1만 2700킬로미터에 달했다. 콜럼버스가 대서양을 가로지를 때 이동한 약 7000킬로미터의 두 배에 가까운 거리였다. 무슬림 소비자를 겨냥한 중국 도기에는 아랍 문자를 흉내 낸 문양이 새겨져 있었다. 이슬람 도공들은 진주광택을 내는 새로운 기법을 개발해 응수했지만, 그래도 중국 도기를 당해 내지 못했다.

- 지리상의 발견 이전의 아메리카와 아프리카
아메리카는 남북 간 교류를 가로막는 자연환경으로 인해 각 문명이 고립되어 있었다고 여겨지곤 한다. 그러나 1000년 무렵의 아메리카에는 이미 남북을 가로지르는 독자적인 교역망이 확립되어 있었다. 가장 눈에 띄는 활동은 마야인들에게서 나타났다. 유카탄반도의 마야인들은 북쪽으로는 미국의 미시시피강 계곡까지, 남쪽으로는 콜롬비아까지 갔다. 뉴멕시코주의 차코 캐니언에서 마야인들은 금강앵무와 초콜릿을 수출하고, 터키석을 수입했다.
아프리카 또한 오래전부터 그들만의 교역망을 만들어 놓은 터였다. 그 교역망에서 가장 매력적인 상품은 금과 노예였다. 가나는 금을 찾아 사막을 건너온 상인들을 상대로 중계무역을 하며 번영했다. 훗날 너무 많은 금을 풀어 카이로의 금 시세를 떨어뜨렸다는 만사 무사의 부가 어디서 왔는지 짐작게 하는 대목이다. 따라서 대항해시대 이후에 아프리카를 찾아온 유럽인들은 새로운 교역망을 만든 것이 아니었다. 이미 번성하고 있던 금 무역과 노예무역에 참여했을 뿐이었다.

- 바이킹이 콜럼버스보다 먼저 아메리카에 도착하다
바이킹(노르드인)들이 콜럼버스보다 먼저 아메리카에 도착했다는 것은 이제 잘 알려진 사실이다. 하지만 콜럼버스의 항해와 달리 항구적인 영향을 남기지 못했기에 해프닝으로 취급되곤 한다. 정말 우발적이고 의미 없는 사건이었을까?
1000년 무렵에 노르드인들은 ‘빈란드’를 총 세 차례 탐험했다. 그들의 뛰어난 항해술 앞에서 대서양은 큰 장애가 되지 못했다. 가장 큰 위협은 현지인들에게서 왔다. 아메리카 원주민들은 활과 화살뿐 아니라 투석기까지 동원해 노르드인들을 공격했다. 격렬한 저항에 못 이긴 노르드인들은 정착지를 버리고 철수해야만 했다.
약 500년 후의 콜럼버스는 성공했는데, 노르드인들은 어째서 실패했을까? 그들은 북해와 지중해를 누비며 연안을 약탈하던 사람들의 후예였다. 그러나 현지인들도 노르드인들 못지않게 강하고 사나웠다. 노르드인들에게는 철제 무기가 있었지만, 현지인들을 압도할 정도는 아니었다. 기술의 차이가 거의 없는 엇비슷한 상황이라면 세계화가 어떻게 전개될 수 있는지 보여 주는 사례다.

우리는 1000년의 유산 속에서 살고 있다

1000년 무렵, 두려움 없이 미지의 세계로 떠나 탐험과 교역에 나섰던 이들을 통해 마침내 위대한 문명들이 연결되었다. 그렇게 발견되고 개척된 새로운 통로들은 세계 각지를 하나로 묶어 주었다. 상인과 순례자들은 인도양을 건너 동아프리카와 아라비아, 인도, 중국을 오가는 항해를 하고 있었다. 대서양 횡단 노예무역이 시작되려면 수백 년이 남아 있었지만, 노예들은 이미 중앙아시아와 동유럽, 아프리카에서 바그다드와 콘스탄티노플, 카이로로 행진하고 있었다. 예수 탄생 이후 첫 번째 밀레니엄이 끝나 가던 무렵에 세계화는 이미 시작되어 있었다.
이 책은 최초의 세계화가 촉발한 갈등과 협력을 교차해 보여 준다. 예나 지금이나 세계화는 승자와 패자를 함께 만들어 내기 마련이다. 세계가 근본적으로 바뀐 1000년에도 그 점은 다르지 않았고, 그 영향은 지금도 감지되고 있다. 1000년이 남긴 장기적 유산을 이해할 필요가 있는 것도 그 때문이다.

 
 

목차

저자의 말
프롤로그

1장 1000년의 세계
2장 가자 서쪽으로, 젊은 바이킹들이여
3장 1000년의 팬아메리칸 하이웨이
4장 유럽의 노예들
5장 세계 최고의 부자
6장 둘로 갈라진 중앙아시아
7장 놀라운 항해
8장 지상에서 가장 세계화된 지역

에필로그
감사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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삽화와 사진의 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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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용 출처 : 교보문고 >
:
Posted by sukji
2022. 2. 16. 10:45

책으로 떠나는 세계여행 추천도서/컬렉션2022. 2. 16. 10:45

 

책으로 떠나는 세계여행

 

▲ 동물복지 수의사의 동물 따라 세계 여행  /  양효진 지음 / 구입 중

▲ 한 권으로 읽는 세계사  /  다마키 도시아키 지음 / 정리 중 

 


                                            [책공장더불어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명절 연휴 홀가분하게 떠나는 해외여행은 이제 먼 옛날 일처럼 느껴진다. 외국은커녕 고향길도 막힌 채 맞는 세 번째 설 연휴, 동물과 역사를 테마 삼아 독자를 세계 각국으로 안내하는 책들이 나왔다.

'동물복지 수의사의 동물 따라 세계 여행'은 동물원에서 일하던 수의사가 세계 곳곳의 동물원과 국립공원·동물보호구역을 다니며 동물들을 만난 이야기다.

저자는 호주 시라이프 수족관에서 시작해 미국 옐로스톤 국립공원, 영국 런던 동물원, 태국 카오야이 국립공원까지 5년간 19개국 178곳을 돌아다녔다. 각자의 공간에서 살아가는 동물들의 생태에 대한 설명과 함께 사진 300여 장도 실려 있다.

언뜻 동물원 관광 안내서로 보일 수도 있지만, 동물원을 일터로 삼았던 저자가 던지는 질문은 묵직하다. 사람들에게 동물원이란 어떤 곳일까? 동물원은 진짜 자연을 만날 수 있는 올바른 길을 제시하고 있을까? 동물원의 미래는 어떻게 될까?

동물원은 태생적으로 정복과 과시의 욕망에서 자유롭기 어렵다. 19세기 독일의 카를 하겐베크는 사업이 어려워지자 세계 각지 소수민족 사람들을 동물원에 전시했다. 창경궁의 격을 낮춰 만든 창경원은 조선을 침략한 일본의 '트로피' 같은 공간이었다.

저자는 동물원이 자연 아닌 인간을 보는 창이라고 말한다. 인간이 동물을 어떻게 인식하고 대하는지 드러내기 때문이다.

"관람객은 동물원의 동물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동시에 동물을 보고 있는 자신 또한 이해하지 못한 채 동물원을 나선다. 동물원이 자연을 보는 창이라면, 그들이 보는 자연은 딱 창만큼일 것이다."


                                                [사람과나무사이 제공. 재판매 및 DB 금지]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오래 살았다면 광대한 영토를 질서정연하게 다스렸을까? 바이킹은 콜럼버스보다 500년 일찍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고도 왜 최초 발견자로 인정받지 못했을까? '한 권으로 읽는 세계사'는 열세 가지 결정적인 장면에 대한 질문에 답하는 방식으로 세계사를 정리한 책이다.

저자의 생각은 때때로 통념을 뒤집는다. 경제사를 전공한 저자는 근대 유럽의 경제성장이 근면과 금욕을 중시하는 기독교 정신에서 비롯했다는 시각에 반대한다. 상인들은 종교와 무관하게 공동으로 상업활동을 했으며, 구텐베르크의 활판 인쇄술이 핵심적 역할을 했다고 주장한다. 중립국은 전쟁을 반대하는 국가가 아니라 전쟁에서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국가라고 본다. 나폴레옹전쟁 당시 중립을 선언한 미국은 유럽 각국에 물자와 자원을 실어나르며 경제력을 키워나갔다.

 

 

< 출처 : 매일경제신문 >

:
Posted by sukji

 

제일 처음 굴을 먹은 사람은 누구일까 : 인류 역사상 가장 기발하고 위대한 처음을 찾아서

/ 코디 캐시디   909 C345wKㅅ  사회과학열람실(3층)  

 

책소개

 

역사가 기록하기 전, 세상을 바꾼 사람들이 있다

한 권으로 인류의 역사를 가로지르는,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흥미진진하고 기발한 문명 탐험!

“수천 년에 걸친 인간의 발전 과정을 한 권으로 간략하게 이해하게 한다” - 커커스 리뷰

〈걸리버 여행기〉를 쓴 영국의 풍자작가 조너선 스위프트는 “그는 세계 최초로 굴을 먹은 대담한 남자였다”라는 유명한 말을 남겼다. 창백한 귓불처럼 생긴 굴을 처음 먹은 것이 대단히 용기 있는 행동이었다는 점에서는 그의 말이 옳지만, 사실 이 말은 틀렸다. 세계 최초로 굴을 먹은 대담한 사람은 남자가 아니라 아마도 여자였을 것이다. 16만 4천 년 전에는 남녀의 역할이 엄격하게 구분되어 있었고 당시 채집은 여자의 일이었기 때문이다.
〈제일 처음 굴을 먹은 사람은 누구일까〉는 누구도 깊이 생각해보지 않았으나 지금 우리의 삶을 바꾼 것들의 시작을 찾아 떠난다. 저자인 코디 캐시디는 역사가 기록하기 전 세상을 바꾼 사람들을 만나기 위해 아주 오래전 그 당시를 파헤친 많은 연구를 프로파일링하며 그 시기를 드나든다.

누가 바퀴를 발명했는가? 제일 처음 기록된 농담은 무엇인가? 누가 처음 맥주를 마셨나? 첫 번째 살인 미스터리의 살인자는 누구였고, 최초의 뇌수술을 한 사람은 누구였으며, 미끌거리고 창백한 굴을 가장 먼저 용감하게 먹은 사람은 누구였는가?
저자는 이 놀라운 혁신가들의 숨겨진 이야기를 밝혀내기 위해 직접 효모를 발효시키고 맥주 양조장을 찾아가며, 고대의 활과 화살을 알아보기 위해 놀이 연구소를 찾아간다. 또한 알프스를 직접 걸으며 고대에 일어난 살인 희생자의 마지막 걸음을 되짚어본다. 얼핏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이는 이 여정은 들여다보면 현대 유전학에서 진화생물학, 고고학, 심리학, 인류학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분야를 가져와 깊게 파고들고 있다.
역사가 기록하기 전에도 바보, 얼간이, 배신자, 겁쟁이, 사이코패스가 살았고, 다빈치와 뉴턴에 견줄 만한 천재들 또한 존재했다. 세상을 변화시켜온 혁신과 그 뒤에 숨은 고대의 천재들을 찾는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인간의 문명이 어떻게 발전했는지 한눈에 알 수 있다. 이 책은 인류 문명의 발전 과정을 한 권으로 집약해놓은, 어디서도 볼 수 없었던 흥미진진하고 유쾌한 문명 탐험이다.

 

출판사 서평

 

선사 시대에 천재가 살았다니, 그럴 리 없어!

진화생물학, 고고학, 심리학, 인류학 등 다양한 렌즈로 살펴보는 인류 문명의 역사
세상을 변화시켜온 혁신과 그 뒤에 숨은 고대의 천재들

만화나 미디어는 선사 시대 사람들을 동물 가죽을 입고 이상한 소리를 내며 동굴에 사는 미개한 사람들로 그리곤 한다. 당시 사용했던 도구와 기술이 덜 발전했다는 이유로 그들의 지능 역시 지금보다 현저하게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선사 시대에도 천재가 살았다는 주장은 다소 의아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책은 많은 사례들을 통해, 지금처럼 식품이 대량생산되고 자기 직업에 특화된 일만 잘하면 되는 시대를 살아가는 현대인에 비교해서 선사 시대 사람들이 훨씬 다양한 지식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 말하자면 그들은 생존을 위해 주변 환경을 백과사전 수준으로 이해해야 했다는 것이다. 개개인 모두가 모든 음식과 집과 생활용품을 스스로 채집하고, 사냥하고, 만들고, 마련했다. 그러려면 먹어도 되는 식물과 먹으면 안 되는 식물을 구분하고, 각각의 식물이 어떤 계절에 어디에서 자라는지 알아야 했으며, 먹거리가 될 수 있는 동물들이 계절마다 어떻게 이동하는지도 파악하고 있어야 했다. 실제로 책에 나오는 고대의 천재들은 누구도 알려주지 않았지만 밤하늘을 관찰해서 조류를 예측하고, 야생 동물이었던 말을 교배하고 길들이는 등 과학적 지식이 필요한 일을 척척 해낸다.

과학의 발전 덕분에 현대의 우리는 5천여 년 전에 죽은 사람이 마지막으로 한 식사가 무엇인지도 알 수 있게 되었다. 덕분에 이 책에서는 진화생물학자, 고고학자, 심리학자, 인류학자, 예술가, 맥주 전문가까지 각종 분야의 전문가들이 총 출동해서 고대의 한 인물을 프로파일링하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채롭고 풍성한 렌즈를 통해 이들을 단순한 역사의 한 장면이 아닌 한 명의 사람으로, 사실적이고 입체적인 인물로 풀어낸다.

우리가 미처 알지 못했던
영리하고 어리석고 위험하고 용감한 최초의 인간을 만나다

수만 년의 역사를 멀리 떨어져서 바라보면 문화적, 기술적 진화가 매끄럽고 자연스럽게 이어진 것처럼 보인다. 석기가 철기에게 자리를 주고, 채집에서 농사로 이어지는 변화 또한 자연스럽고 당연한 것처럼 느껴진다. 그렇기 때문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인류 진화에서 어느 한 개인이 중요한 역할을 했을 거라는 생각을 쉽게 떠올리지 못한다. 하지만 통나무를 굴려 물건을 옮기던 것에서 마차로 넘어간 것이 당연하고 필연적인 변화는 아니다. 그것은 많은 학자들이 역사상 가장 훌륭한 기계의 발명이라고 인정하는 바퀴와 차축을 누군가가 발명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역사가 이어져오고 문명이 다음 단계로 넘어가는 아주 긴 시간 동안 그 중심에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시도하는 사람이 있었다. 그 시도는 누구도 생각해본 적이 없는 것들이었고, 그들도 자신들의 발명이 인류의 문명을 바꿔놓을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 책을 읽으며 역사는 그 예상치 못한 사람들에 크게 힘입어 지금까지 흘러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그럼에도 저자가 말하듯 ‘한 개인이 지닌 고유한 이야기와 개별성은 그 시대의 인류를 설명하는 글에서 언제나 빠져 있었다.’ 이 책은 역사가 기록하기 전 살아 숨 쉬던 영리하고 어리석고 위험하고 용감한 최초의 사람들을 담은 책이다.

 
 

목차

 

들어가는 글

1 인류 최초의 발명가는 누구였을까
2 누가 불을 발견했을까?
3 누가 처음으로 굴을 먹었을까?
4 누가 옷을 발명했을까?
5 누가 처음으로 활을 쐈을까?
6 누가 세계 최초로 걸작을 그렸을까?
7 누가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했을까?
8 누가 처음으로 맥주를 마셨을까?
9 누가 처음으로 뇌수술을 했을까?
10 누가 처음으로 말을 탔을까?
11 누가 바퀴를 발명했을까?
12 최초의 살인 미스터리에서 살인자는 누구였을까?
13 우리가 이름을 아는 최초의 사람은 누구일까?
14 누가 제일 처음 비누를 만들었을까
15 누가 처음으로 천연두에 걸렸을까?
16 기록된 최초의 농담을 한 사람은 누구였을까?
17 누가 하와이를 발견했을까?

참고문헌
감사의 글

 
< 출처 : 교보문고 >
:
Posted by sukji

 

도시는 왜 사라졌는가 : 도시 멸망 탐사 르포르타주 / 애널리뉴위츠

930.1 N548fKㅇ  사회과학열람실(3층)

 

 

책소개

 

한때 번성했던 네 도시는 왜 종말을 맞았을까?
도시 소멸의 미스터리를 추적한 탐사 르포르타주

사라진 도시들에 숨겨진 문화적 복합성을 치밀하게 파고든 생생한 탐사 르포르타주. 차탈회윅, 폼페이, 앙코르, 카호키아는 번성하는 문명의 중심지였다. 이 도시들은 왜, 어떻게 종말을 맞았을까? 우리는 그 극적인 소멸의 순간에만 집중하고 그 오랜 생존의 역사를 잊곤 한다. 도시를 유지하는 방법에 관해 수많은 결정을 내리면서 보낸 수백 년의 세월을. 사람들이 도시인으로서 살았던 특별한 방식을 이해해야만 그들이 왜 자기네 도시를 죽게 만드는 선택을 했는지 헤아려볼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으로 나아간다. 왜 우리 조상들은 탁 트인 대지의 자유를 버리고 냄새 나며 갑갑한, 인간의 배설물과 끝없는 정치적 드라마로 가득 찬 곳을 선택했을까? 그들은 어떤 직관과 판단에 이끌려 정착하고 농사짓게 됐을까? 어떻게 해서 수많은 사람이 가까이 모여 함께 사는 데 의견을 맞추어 공공의 장소와 자원을 건설했을까?
지은이는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버려진 도시들의 흔적을 수 년간 찾아다니고 최신 고고학 연구를 섭렵했으며 관련 연구자들을 취재했다. 사람들이 왜 떠나갔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이 왜 왔는지, 머무르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를 알아야 했다. 또한 그들이 스스로 건설한 고향을 버렸을 때 그들이 무엇을 잃었는지를 확인하려 했다.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출판사 서평


한때 번성했던 도시는 왜 종말을 맞았을까?
위기를 맞은 도시의 시대, 과거에서 길을 찾다

오늘날 우리는 ‘도시의 시대’에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세계 인구의 상당수는 도시에서 살고 있다. 산업혁명 이후 인구 과밀화로 인한 장점(인프라와 문화 등)과 단점(환경, 주거, 빈부 문제 등)은 이미 우리에게 익숙하다. 하지만 코로나 상황과 급격한 기후변화 등으로 인류세(Anthropocene)에 대한 경각심이 커진 요즘, 그 집약체인 도시 문제가 새삼 부각되고 있다.
《도시는 왜 사라졌는가》는 그 반면교사로서 과거 크게 번성했으나 종말을 맞은 도시들의 미스테리를 추적하는 탐사 르포르타주다. 차탈회윅, 폼페이, 앙코르, 카호키아는 번성하는 문명의 중심지였다. 그들의 어두운 미래는 결코 미리 정해진 것이 아니었다. 이 도시들은 왜, 어떻게 종말을 맞았을까? 우리는 그 극적인 소멸의 순간에만 집중하고 그 오랜 생존의 역사를 잊곤 한다. 도시를 유지하는 방법에 관해 수많은 결정을 내리면서 보낸 수백 년의 세월을. 사람들이 도시인으로서 살았던 특별한 방식을 이해해야만 그들이 왜 자기네 도시를 죽게 만드는 선택을 했는지 헤아려볼 수 있다.
이러한 접근은 보다 근본적인 질문으로 나아간다. 왜 우리 조상들은 탁 트인 대지의 자유를 버리고 냄새 나며 갑갑한, 인간의 배설물과 끝없는 정치적 드라마로 가득 찬 곳을 선택했을까? 그들은 어떤 직관과 판단에 이끌려 정착하고 농사짓게 됐을까? 어떻게 해서 수많은 사람이 가까이 모여 함께 사는 데 의견을 맞추어 공공의 장소와 자원을 건설했을까?
이 책의 지은이 뉴위츠는 그 해답을 찾기 위해 버려진 도시들의 흔적을 수 년간 찾아다니고 최신 고고학 연구를 섭렵했으며 관련 연구자들을 취재했다. 사람들이 왜 떠나갔는지를 이해하기 위해 그들이 왜 왔는지, 머무르기 위해 얼마나 열심히 노력했는지를 알아야 했다. 또한 그들이 스스로 건설한 고향을 버렸을 때 그들이 무엇을 잃었는지를 확인하려 했다. 그것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

도시 소멸의 미스터리를 풀어내려면
어떻게 번성하고 유지되었는지를 이해해야 한다

차탈회윅, 폼페이, 앙코르, 카호키아의 역사는 사뭇 다르다. 이 책에서 그 차이를 비교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포인트다. 그러나 공통점도 있다. 이 도시들은 모두 수백 년에 걸쳐 끊임없는 변화를 거쳤다. 도시의 배치는 시민이 달라지면서 변했다. 가깝고 먼 여러 곳에서 이 도시들로 이주민이 몰려들었다. 맛있는 음식이나 전문화된 일거리에서부터 여흥과 정치권력을 얻을 기회에 이르기까지 온갖 것이 그들을 끌어당겼다.
이 이주민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 노동계급이었다. 이들이 도시 주민의 3분의 2를 넘는 경우도 있었다. 지도자들은 둔덕과 저택에서 통치했다. 그러나 진정으로 도시를 유지한 것은 농사를 짓고 가게를 운영하고 도로를 건설한 보통의 노동자들이었다.
도시가 커지면서 상층 계급은 사람들을 계약 하인 같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노예화하거나 그들을 농노로 전환시킴으로써 노동력을 조직화했다. 도시를 만드는 것은 여러모로 노동력을 조직화하는 일이었다. 강제하기도 하고 유인하기도 했다. 보통은 두 가지를 병행했다. 그리고 도시가 정치적으로, 환경적으로 휘청거릴 때는 노동자들이 누구보다도 더 압박을 받았다. 그들은 남아서 뒤처리를 하든지 다른 어느 곳에 가서 새출발을 하든지 선택을 해야 했다.
도시의 인구 감소는, 그 원인과 결과는 다르지만, 모두가 끊임없이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인간이 만든 거대한 기반시설을 관리하는 골치 아픈 문제로 인해 촉발된 것이었다. 인간 자체를 관리하는 일은 더욱 큰 문제였다. 도시는 인간 노동력을 실체로서 구현한 것이며, 담장과 저수지와 광장의 파괴에서 그 대중의 흩어짐을 읽어낼 수 있다.

터키 중부 신석기 유적지
차탈회윅

이 책에서 탐구할 첫 번째 도시 차탈회윅은 대략 9000년 전 신석기 시대에 건설됐다. 수십만 년 동안 유목 생활을 하던 인류는 이즈음 농경 생활에 들어갔다. 수수께끼에 싸인 그 유적은 지금 터키 중부 아나톨리아 지역의 낮은 두 구릉 아래 묻혀 있다. 터키 농민들은 구릉지 아래에 실제 도시가 묻혀 있음을 인식하고 있었다. 정교한 공예품들이 일상적으로 쟁기에 걸려 나왔고, 한 언덕 위에는 성벽 일부가 여전히 드러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곳에 살던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무도 자세히 알지 못했다.
대략 천 년 동안 그 인구는 5천 명에서 2만 명 사이로, 당시로서는 대도시였을 것이다. 당시 이 지역에 살던 사람들 대부분은 2백 명쯤이 사는 마을보다 더 큰 정착지를 본 적이 없었다. 차탈회윅은 흙과 이엉으로 건설됐는데, 다닥다닥 붙은 집들이 길게 뻗쳐 있었다. 집 내부로 들어가려면 사다리를 타고 옥상 출입구를 통해야 했다. 주민들이 글을 남기지는 않았지만 조각상과 그림, 상징적으로 장식된 두개골은 많이 남겼다.
서기전 제6천년기 중반의 어느 시기에 차탈회윅 사람들은 복잡하고 비좁은 보도를 버리고 떠났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였다. 지중해 동안 지역에 가뭄이 닥쳤고, 사회 구조상 문제가 생겼으며, 아마도 도시의 구획 자체에도 문제가 있었던 듯하다. 떠난 사람들 대부분은 새로운 형태의 도시를 찾지 않았다. 대신에 그들은 마을 생활 또는 유목 생활로 돌아갔다. 그들은 단순히 차탈회윅을 거부한 것이 아니라 도시 생활 자체를 거부한 듯하다.

이탈리아 남해안의 휴양 도시
폼페이

다음에 탐구할 도시는 잊힌 곳이 아니다. 그 정확한 위치가 한동안 오리무중이긴 했지만 말이다. 햇살 좋은 지중해 연안의 로마 시대 관광지 폼페이는 서기 79년 베수비오산 분출 뒤 화산재 속에 깊숙이 묻혔다. 목격자들과 역사가들이 이 도시의 끔찍한 파멸을 기록했지만, 18세기 이후에야 체계적으로 발굴되기 시작했다.
폼페이가 버려진 이유는 아주 간단한 듯하다. 섭씨 250도의 화쇄암 폭풍이 마을을 덮쳐 모두를 쓸어내 버린 것이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치는 않다. 폼페이는 과거에도 자연재해를 겪었다. 베수비오 분출 십여 년 전 지진이 발생해 엄청난 피해를 당했지만 딛고 일어섰다. 폼페이에 사는 사람들은 그곳이 위험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실제로 화산이 분출하던 날 아침에 주민의 절반 이상이 대피했다. 그들은 치명적인 폭발 몇 시간 전 산에서 연기가 나고 진동이 시작될 때 도망쳤다. 이 도시의 종말에 관한 흔한 기록은 로마인들이 미신과 두려움 때문에 파묻힌 도시를 꺼려, 한때 살던 곳에서 금세 발길을 끊었다고 주장한다. 사실과 너무도 동떨어진 이야기다.
고고학자들은 최근, 제국이 난민들을 나폴리 같은 인근 해안 마을들로 이주시키고 그들을 수용하기 위해 시역을 넓히고 도로를 늘렸다는 새로운 증거를 찾아냈다. 많은 귀족들이 폭발로 죽으면서 재산을 남겼기 때문에 정부는 해방 노예들이 주인의 재산을 물려받도록 허락했다. 이 해방 자유민들은 독자적으로 풍족한 생활을 누렸다. 폼페이는 사라졌지만 로마의 도시 생활은 여전히 번성했다.

중세 캄보디아의 거대 도시
앙코르

앙코르는 폼페이가 단 하루에 겪은 재난을 아주 천천히 당했다. 이 도시는 한 번의 화산 분출 대신 백 년 동안 이어진 기후 위기의 연타를 맞았다. 걸린 시간은 달랐지만 결과는 비슷했다. 홍수 같은 환경 재난으로 인해 이 도시는 주민들 대다수가 살 수 없는 곳이 됐다. 하지만 최후의 일격은 자연과는 전혀 관계가 없는 것이었다. 앙코르의 왕들은 더 이상 일꾼 부대를 동원해 도시의 생명선인 수로망을 재정비할 수 없었다. 아마도 앙코르의 도시 계획에서 가장 유지하기 어려웠던 것은 저수지 시설이 아니라 강제노동에 의존한 엄격한 사회적 위계였던 듯하다.
19세기에 앙리 무오라는 프랑스 탐험가가 ‘사라진 도시’ 앙코르를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이 시기의 다른 유럽인 여행자들이 앙코르와트 사원 구내에 아직도 승려들이 살고 있다고 확인해주었지만, 무오는 인기 있는 여행기를 써서 자신이 처음으로 이 사라진 문명을 ‘우연히’ 발견했다고 주장했다. 또한 그는 수백 년 동안 이것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으며, 고대 이집트 유적에 필적할 만한 멋진 유적들이 가득하다고 주장했다. 그것은 영원히 유지되기 십상인 신화였다. 모험담에 목말랐던 서유럽인들은 형편없이 무너진 도시의 사원과 불거진 나무뿌리로 인해 쪼개진 담장의 돌들 사진을 보고 무오의 말에 홀딱 빠졌다. 애당초 앙코르를 사라진 도시로 자리매김한 것은 미디어의 조작 때문이었다. 모든 증거는 그 반대였다.

미국 미시시피 강변의 대도시
카호키아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또 다른 거대 중세 도시가 확대됐다가 축소됐고, 운명의 역전은 그 풍광에 영원히 새겨졌다. 카호키아는 유럽인들이 오기 전에 북아메리카에서 가장 큰 도시였다. 미시시피 강변 저지의 작은 마을이 성장해 3만 명이 넘는 팽창하는 대도시가 됐다. 그 영역은 강 양쪽에 걸쳐 있었다. 카호키아인들은 흙으로 쌓은 높다란 피라미드와 다락 통로를 건설했다. 집과 농경지가 펼쳐진 사이사이에 제례 시설들이 있었고, 여기서 축제가 열려 남부 전역의 사람들을 끌어들였다. 900년에서 1300년 사이에 카호키아는 위스콘신에서 루이지애나에 이르는 미시시피강 유역의 도시와 마을들을 묶어준 사회 운동이자 영적 운동이었던 ‘미시시피’ 문화의 중심지였다.
이스트세인트루이스를 발굴하던 고고학자들은 수십 개의 집 모형이 일시에 불탄 현장을 발견했다. 벽들은 불길에 휩싸이고 옥수수, 도예품, 아름답게 만들어진 화살촉 등 봉헌물들도 불에 탔다. 아마도 카호키아인들은 주변의 모든 건조물들에도 정해진 수명이 있다고 보고 언제나 전체 도시가 일시에 폐쇄되는 것으로 생각했던 듯하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카호키아는 종말을 염두에 두고 설계됐으며, 둔덕을 엄청난 높이로 쌓아 올릴 때에 이미 그 운명은 봉인됐던 듯하다.

 
목차

프롤로그: 도시는 어떻게 사라졌나

1부 차탈회윅 - 출입구

1장 정주 생활의 충격
인디애나 존스의 맞수 | 인류의 순화(馴化) | 땅에 대한 권리 주장 | 추상성의 증대

2장 여신들에 관한 진실
때로 벗은 여성은 벗은 여성이 아니다 | 가내 기술

3장 역사 속 역사
8200년 전의 기상 사건 | 계층 문제 | 죽음의 구덩이

2부 폼페이 - 거리

4장 델라본단차 거리의 폭동
이시스 여신과 난쟁이 | 줄리아 펠리체의 사업 | 네로가 행한 몇 가지 선행 | 부엌의 사람들

5장 공개적으로 하는 것
타베르나 순례 | 배수로 데이터 | 리베르투스의 성장 | 거시기 빨기의 여왕 | 로마의 화장실 예법

6장 산이 불탄 뒤
“엄청난 악몽” | 가이우스 술피키우스 파우스투스의 행운

3부 앙코르 - 저수지

7장 대체 농업사
밀림 속의 농업 | 레이저 이용하기 | 도시 이전의 도시

8장 물의 제국
채무노예와 그 후견자들 | 도시의 인구 폭발 | 화폐 없는 경제 | 돌의 취약성

9장 제국주의의 잔재
첫 번째 범람 | 천의 얼굴을 가진 왕 | 기후 재앙

4부 카호키아 - 광장

10장 아메리카의 고대 피라미드
운동 참여 | 미시시피의 공적 생활 | 북아메리카의 사라진 농작물들 | 집의 폐쇄

11장 대부흥
이스트세인트루이스의 ‘재활용’ | 카호키아의 민주화 | ‘붕괴’에 대한 대비

12장 의도적인 폐기
‘수도사 둔덕’ 거부 | 부흥과 그 이후의 멸망 | 서비번스

에필로그: 경고 - 진보를 위한 사회적 실험

감사의 말
옮긴이의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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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교보문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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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ukj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