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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과 쏠림…AI 발달로 가장 큰 타격 받는다

 

 

노벨경제학상 수상 피사리데스 교수
“AI 발달할수록 AI가 스템 직무대체”
코파일럿 이후 ‘코딩교육 회의론’ 확산
대면접촉·소통위주 직무 “타격 적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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챗GPT를 개발한 오픈AI가 서비스하는 이미지 생성프로그램 달리(DALL·E)로 만들어낸 이미지. “코딩을 전공한 대학졸업자가 취업난을 겪고 있는 모습을 그려줘”라는 명령어를 입력하자 3초만에 표현해냈다.

 

 

# 저명한 노동시장 경제학자로 2010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크리스토퍼 피사리데스 교수가 젊은 세대의 과학·기술·공학·수학(STEM, 스템) 전공선호에 대해 경고했다. 피사리데스 런던정경대(LSE) 교수는 이달초 블룸버그통신 회견에서 “데이터를 수집·대조·개발하고 이를 활용해 차세대 인공지능을 개발하거나 인공지능을 직무에 접목하는 데 필요한 기술은 결국 인공지능이 그 일을 대체할 것이기 때문에 쓸모없어질 것”이라고 말했다.

 

# 안드레아스 슐라이허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교육국장은 2019년 파리에서 열린 세계교육혁신회의 강연에서 “코딩 교육은 시간 낭비”라고 지적했다. 그는 “지금 세살짜리에게 코딩을 가르치지만 그들이 대학 졸업할 때면 코딩이 무엇인지 잊게 될 것이며 코딩 기술은 아주 빨리 쓸모없어질 것”이라며 “코딩 교육은 우리 시대의 기술이며 그것을 깊게 배우게 하면 큰 실수”라고 말했다. 슐라이허 국장은 국제학업성취도평가(PISA)를 출범시키고 주관해오면서 세계 각국의 교육정책과 성과를 수십년간 연구해온 최고의 전문가다.

 

2024학년도 수능에서 이과생(선택과목 기준) 비중(51.7%)이 1993년 수능 도입이래 최고치를 기록하고, 취업에서 유리한 공학·기술 전공 선호가 갈수록 높아지고 있다. 학생·학부모·교사· 정책담당자 등 교육 관계자들의 일반적 견해와 상당한 거리가 있는 위 발언은 인공지능 기술의 발달로 새롭게 주목받고 있다.

이는 최근 발표된 각종 보고서와 국제 포럼에서 나온 미래전망과도 궤를 같이 한다. 국제통화기금(IMF)이 지난 14일 발표한 ‘인공지능세대: 인공지능과 일의 미래’ 보고서는 “자동화와 정보기술 발전은 반복적 업무에 영향을 끼쳤지만, 인공지능은 고학력·고숙련 노동자의 일자리에 충격을 준다는 점에서 구별된다”며 “선진국 일자리의 60%가 인공지능에 노출돼 있으며 그중 절반은 부정적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내다봤다.

 

경제협력개발기구도 지난해 7월 보고서를 통해 “인공지능 자동화로 인해 가장 위험이 높은 직업은 고숙련 직업이며, 법률·의료·금융 직군이 가장 큰 위험에 처해 있다”고 연구결과를 발표했다. 기업들이 인공지능에 투자하는 이유는 성과 향상과 인건비 절감인데, 전문 교육을 필요로 하는 고임금 일자리가 가장 큰 타격을 입을 수 있다는 분석이다. 개발기구는 이런 고숙련 직업이 한국을 포함한 38개 회원국 전체 고용의 약 27%를 차지한다고 밝혔다.

 

챗GPT를 개발한 오픈AI가 서비스하는 이미지 생성프로그램 달리(DALL·E)로 만들어낸 이미지. “스템 과목을 전공한 대학졸업자가 취업난을 겪고 있는 모습을 그려줘”라는 명령어를 입력하자 3초만에 표현해냈다.

 

한국은행이 지난해 11월 펴낸 ‘인공지능과 노동시장 변화’ 보고서에서도 비슷한 연구결과가 나왔다. 이 보고서는 “국내 취업자의 12%(341만명)는 인공지능 기술에 의한 대체가능성이 높은데 기존 기술과 달리 고소득·고학력 노동자가 인공지능에 더 많이 노출돼 고용이 줄어들고 임금상승률도 낮아질 것”이라고 내다봤다. 한은 보고서는 인공지능 노출지수가 높은 대표적인 직업으로 일반의, 전문의, 회계사, 자산운용가, 변호사를 예시했다. 인공지능에 가장 덜 노출된 직업은 고객과 관계 형성이 필수적인 일로 숙박음식업· 예술·스포츠·여가 등 대면 서비스 직군으로 나타났다.

코딩 교육이 사례다. 알파고 충격 이후 코딩 교육 열풍이 불어 2018년부터 중학 교육과정에서 코딩 교육이 의무화되고 이듬해 초등 5·6학년으로 확대됐다. 수백만원짜리 코딩 캠프와 학원이 등장했지만 한때 ‘19단 외우기’ 마케팅처럼 코딩 교육 열기도 시들해졌다. 기술 발달 덕이다. 아주 낮은 수준의 코딩으로 앱이나 프로그램을 만들 수 있게 도와주는 로 코드(low code), 또는 아예 코딩이 필요하지 않은 노 코딩(no coding)이 등장한 게 배경이다. 게다가 인공지능 기술을 적용한 깃허브의 코딩 보조프로그램 ‘코파일럿(Copilot)’이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코딩의 문턱은 더욱 낮아졌다.

 

피사리데스 교수는 “인공지능이 고용시장에 전체적으로는 긍정적 영향을 끼치고 스템 분야도 성장하겠지만 취업 희망자를 수용하기엔 충분치 않다”며 “미래에는 서비스업과 의료업 등 사람과 얼굴을 맞대고 소통해야 하는 직업의 수요가 여전히 높을 것”이라고 말했다. 인공지능으로 직업환경이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 만큼 특정한 기술(하드스킬)보다 공감과 창의성을 갖추고 유연한 적응력을 발휘하는 게 필요하다는 걸 알려준다.

김승보 한국직업능력연구원 선임연구위원은 “공감과 감성적 접근이 빠진 하이테크 위주의 기술은 인공지능에 대체되기 더 쉬워진다”며 “인터넷을 다루는 게 초기엔 특정 직무였다가 보편 직무가 된 것처럼 인공지능도 보편 직무화할 것이고 그에 따라 스템 교육을 강조해온 접근법에도 새로운 고찰이 필요해지고 있다”고 말했다

 

 

< 출처 : 한겨레신문 > 

:
Posted by sukji

 

 

 

[기획연재] 과학자의 발상법 : https://www.khan.co.kr/series/articles/am029

 

챗GPT가 바꿀 대학의 미래 : 교수 혼자 떠들고 학생 여럿이 듣는, 

그런 강의의 끝이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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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 |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팬데믹 기간 동안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강제한 온라인 비대면 수업, 시간·공간적 제약 뛰어넘어
챗GPT의 등장, 또 한 번의 혁신 예고…학생 수준에 따라 맞춤형 교육 가능한 ‘인공지능 개인교수’ 등장할 수도
‘누가 많이 아는가’보다 ‘누가 해결할 수 있는가’가 중요한 시대…지식의 생산 주체도 변화

 

지난해 12월 미국의 오픈AI가 챗GPT를 발표했다. 불과 석 달여 지났을 뿐인데 세상은 온통 챗GPT로 난리다. 7년 전 알파고가 세상을 놀라게 했던 것보다 더한 열풍이다. 문제는 이게 그저 시작일 뿐이라는 점이다. 지난 14일 오픈AI는 전격적으로 GPT-4를 공개했다. 이전 버전과 달리 GPT4는 이미지도 인식한다. 오픈AI가 공개한 ‘GPT-4 기술보고서’에 따르면 프랑스 에콜 폴리테크닉의 물리학 시험지를 이미지로 인식해 프랑스어를 이해하고 물리학 문제를 완벽하게 풀어낸다. GPT-3.5를 기반으로 하고 있는 이전 챗GPT가 한국 대학수학능력시험 문제를 풀었을 때 모든 과목에서 높은 점수를 얻은 건 아니라고 했는데 GPT-4라면 다를지도 모르겠다. 기술보고서에는 GPT-4의 다양한 시험 결과가 공개돼 있다. 거의 모든 시험에서 GPT-4는 GPT-3.5의 결과를 크게 앞섰다. 예컨대 SAT 수학과목은 상위 11%로, 상위 30%였던 GPT-3.5보다 좋은 성적을 얻었다.

 

GPT-4가 공개된 이틀 뒤인 16일에는 마이크로소프트사에서 GPT-4 기반의 대형언어모형을 접목한 ‘마이크로소프트365코파일럿(MS 365 copilot)’이라는 새로운 앱을 선보였다. 코파일럿에서는 예컨대 간단한 명령어를 입력하면 파워포인트의 슬라이드를 만들어주는 식이다. 코파일럿 앱이 공식적으로 출시되면 우리의 일상적인 업무환경도 크게 바뀔 것이다.

 

요즘은 이처럼 자고 일어나면 새로운 인공지능을 장착한 서비스가 쉴 새 없이 쏟아진다. 변화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하나하나 항목을 쫓아가는 것만으로도 버겁다. 이러다 정말 레이 커즈와일이 주장했던 ‘특이점’(기계가 인간을 넘어서는 시점)이 머잖아 도래하는 게 아니냐는 이야기도 들린다. 롤러코스터를 탄 듯한 시대의 흐름 속에 그 레일의 끝에 과연 무엇이 있을지 상상조차 하기 어렵다.

 

그러나 그냥 넋만 놓고 있기엔 신기술이 바꾸는 일상 또한 만만찮게 버겁다. 당장 대학에서는 새 학기 시작과 더불어 챗GPT를 어떻게 할 것인지로 뒤숭숭하다. ‘적극적으로 도입해 학생들의 창의력을 높이는 방향으로 교육의 틀을 바꾸고 교수와 학생 모두 최대한 활용할 수 있는 교육이 필요하다’ ‘부작용을 막기 위한 방책도 필요하다’ ‘단순히 챗GPT 결과를 베껴 쓰는 걸 방지하기 위한 기술적·제도적 준비가 있어야 한다’ 등의 말은 너무나 타당하지만 그만큼 공허하게 들린다. 어떻게 어디까지 도입하고 평가는 어떻게 바꾸고 교육의 틀은 어느 수준까지 파괴할 것인지 모두 쉽지 않은 문제들이다. 보다 본질적으로 챗GPT 같은 인공지능 서비스와 함께 ‘협업’을 하는 시대에 인간의 창의성이란 과연 무엇인지도 새롭게 돌아보게 된다.

 

지난 칼럼에서 말했듯이 나는 챗GPT가 ‘한국형 천재의 디지털적 구현’이라고 생각한다. 한국형 천재는 많은 지식과 ‘정답’을 암기하고 있어서 궁금한 걸 물어보면 즉시 대답할 수 있는 인재이다. 챗GPT가 등장했다는 것은 이제 더 이상 우리가 한국형 천재에 집착할 이유가 사라졌음을 뜻한다. 그런 인재를 길러내 현장에 투입할 필요가 없어졌다. GPT-4는 한국어 실력도 아주 향상되었다고 한다.

 

인공지능이 외국어로 된 물리학 시험 문제를 이미지로 인식해서 척척 풀어내는 시대에 우리의 수능은 과연 무엇을 위한 시험일까? 오직 상위권 변별력만을 위해 빙빙 꼬아서 만든 수학 문제, 영어를 모국어로 쓰는 사람들조차 머리를 쥐어뜯게 만드는 영어 문제, 과정은 전혀 중요하지 않고 오직 교과과정에서 요구하는 결과만 얻으면 되는 생명과학 문제를 잘 푸는 능력을 측정해서 챗GPT 시대에 대체 우리는 뭘 할 수 있을까? 아주 오래전부터, 아마도 학력고사 시절부터 적잖은 사람들이 입시체계 및 한국 교육의 근본적인 변화를 촉구해왔다. 그때부터 하나씩이라도 바꿔왔더라면 지금의 당혹감은 훨씬 줄어들었을 것이다.

 

그렇게 입학한 대학은 얼마나 잘 준비돼 있을까? 지난 팬데믹 기간 동안 코로나19 바이러스가 강제한 온라인 비대면 수업은 이 시대 대학이란 무엇인가라는 근본적인 질문을 남겼다. 아주 간단히 말하자면 비대면 수업은 수업시간·대학 강의실이라는 시간적·공간적 제약을 허물었다. 이는 단지 교수와 학생들의 출퇴근 및 등하교 부담을 줄였다는 것 이상의 큰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세상에 지금과 같은 대학이라는 기관이 등장한 것은 11세기 전후 유럽에서였다. 중세 대학의 모습을 그린 그림들을 보면 무척 흥미롭다. 내가 가장 놀라는 점은 그때나 지금이나 대학수업이라는 것이 한 명이 앞에서 떠들고 나머지 다수가 자리에 앉아 그걸 듣고 있는 모습이다. 개중에는 딴짓을 하거나 조는 사람도 있다. 이 또한 지금도 마찬가지이다. 지난 1000년 동안 교수자가 학생들에게 정보를 보여주는 방식에는 엄청난 변화가 있었다. 더 좋은 칠판과 더 좋은 분필이 도입되었고 컴퓨터와 연결된 프로젝터와 스크린 또는 대형 디스플레이나 전자칠판도 갖춰져 있다. 요즘엔 학생들이 종이로 된 교과서나 노트보다 스마트 기기 한두 개만 달랑 들고 다니는 경우도 많다.

 

이 모든 엄청난 변화에도 불구하고 ‘같은 시간 같은 장소에서 한 명이 여럿에게’ 떠든다는 형식은 1000년이 지나도록 여전히 변하지 않았다. 그것을 무너뜨린 것이 팬데믹 시기의 비대면 수업이었다. 정보통신기술의 발달이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걷어버렸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뛰어넘는다는 것은 누구라도 최고 수준의 강의를 언제 어디서나 들을 수 있다는 뜻이다. 기술적으로는 지방의 대학생들도 국내 명문 대학 또는 세계 최고 대학의 강의를 듣는 게 어렵지 않다. 사람들은 비대면 강의의 이런 잠재력으로부터 대학의 위기를 본격적으로 느끼기 시작했다. 메타버스까지 접목된다면 지금 대학 캠퍼스를 채우고 있는 크고 작은 강의실들은 조만간 그 용도를 바꿔야 할지도 모른다. 근본적인 원인은 정보통신기술의 발달로 지식의 생산과 유통 방식이 크게 바뀌었다는 사실이다. 이미 많은 학생들은 유튜브를 통해 정규수업에서 부족한 부분을 채우고 있다. 팬데믹은 이런 경향을 단지 극적으로 가속화했을 뿐이다.

 

챗GPT의 등장은 또 한 번의 혁신을 예고하고 있다. 챗GPT는 말하자면 모든 학생들이 개인교수를 두는 것과도 비슷하다. 물론 아직 챗GPT의 수준이 그렇게까지 높진 않은 데다 잘못된 대답을 주는 ‘환각(hallucination)’ 현상도 극복되지 않았지만, 그 가능성은 충분히 보여줘서 머지않은 미래에 현실이 될 것이다. 게다가 이 개인교수는 하나의 분야만 잘 아는 게 아니다. 학생 입장에서는 과목별로 어느 교수의 수업을 찾아 쫓아다닐 필요도 없다. 필요한 지식의 ‘에브리씽’을 ‘에브리웨어’에서 ‘올앳원스’로 얻을 수 있게 되는 셈이다.

 

팬데믹 기간 온라인 수업이 ‘같은 시간 같은 장소’라는 제약을 허물었다면 챗GPT는 거기에 더해 ‘한 명이 여럿에게’라는 장벽마저 허물었다. ‘한 명이 여럿에게’ 체제에서 특히 한국적 상황에서는 자유로운 질문이 쉽지 않았지만 ‘개인교수’ 챗GPT에는 그런 제약조차 없다. 개인교수의 최대 장점은 학생의 학습 수준에 따라 얼마든지 맞춤형 교육이 가능하다는 점이다.

 

개인별 맞춤형 교육은 물리적으로 가능하다면 모든 교육기관이 꿈꾸는 모습일 것이다. MS의 코파일럿 같은 시스템이 도입된다면 조만간 대학이 원하는 강의 동영상도 몇 번의 명령어 입력으로 쉽게 만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다 대한민국에서, 또는 전 세계에서 해당 주제를 가장 잘 강연하는 사람의 영상을 학습해 반영할 수 있다면 어떻게 될까? 인건비를 줄이려는 대학이나 수업 부담을 줄이고 싶은 교수들에겐 모두 희소식일 것이다. 그 와중에 일자리를 잃는 사람들도 물론 엄청나게 많을 것이다.

 

대학이 하는 일 중에서 단순한 지식의 전수는 전공과 교양을 불문하고 좋든 싫든 이제 인공지능에 자리를 물려줄 가능성이 커졌다. 다만 실험이나 실습, 토론, 프로젝트형 수업은 인공지능으로도 대체가 불가능(도움은 받을 수 있겠지만)하다. 결국 한 명이 혼자 떠들고 여럿이 이를 지켜보는 교육 방식은 종말을 맞을 것이다.

 

우리 고등교육의 목표도 누가 많은 지식을 알고 있는가가 아니라 누가 허용된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가라는 방향으로 바뀌어야 한다. 필요하다면 프로그래밍 언어를 몰라도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코딩을 해서 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함양해야 하지 않을까? 자동차를 운전하기 위해 엔진의 구조와 작동원리까지 세세하게 알 필요는 없다. 물론 자동차를 설계하고 만드는 사람, 고장 나면 정비하는 사람도 필요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운전하는 법만 알면 된다.

 

지식의 전수가 이뤄지는 대학이라는 울타리 자체가 이제 챗GPT의 시대에 별 의미가 없을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앞으로는 대학의 또 다른 임무, 즉 지식의 생산이라는 역할이 지금보다 훨씬 더 중요해질 것이다. 지금까지는 그 작업에 교수와 대학원생들이 주로 참여해왔지만 앞으로는 인공지능의 도움으로 쉽게 ‘운전’을 배울 수 있는 학생들도 큰 역할을 할 수 있다. 그 과정이 학생들에게 새로운 교육의 기회이기도 하다. 즉, 지식의 생산과 유통(전수)의 구분이 흐릿해지는 것이다. 학생들이 단지 기성의 지식을 습득하고 전수받는 데 그치지 않고(그 과정은 인공지능 개인교수가 주로 담당하게 될 테니까) 직접 지식 생산의 한 주체로 나설 수 있다. 앞으로의 대학 경쟁력은 바로 여기서 나오지 않을까?

 

GPT-4가 내일 당장 이 모든 변화를 몰고 오지는 않을 것이다. 모레 아침엔 또 다른 놀라운 신기술이 등장할지도 모른다. 다만,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의 혼란 속에서도 이 모든 기술적 진보가 가리키는 방향은 명확하다. 전통적 의미의 대학이 종말을 맞이할 날이 이제 머지않았다.

 

 

▶이종필 교수


1971년 부산에서 태어났다. 1990년 서울대 물리학과에 입학했으며 2001년 입자물리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이후 연세대·고등과학원 등에서 연구원으로, 고려대에서 연구교수로 재직했다. 2016년부터 건국대 상허교양대학에서 조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 <신의 입자를 찾아서> <대통령을 위한 과학 에세이> <물리학 클래식> <이종필 교수의 인터스텔라> <빛의 속도로 이해하는 상대성이론> 등이 있고, <최종이론의 꿈> <블랙홀 전쟁> <물리의 정석> <스티븐 호킹의 블랙홀> 등을 우리글로 옮겼다.

 

 

 

< 출처 : 경향신문 > 

:
Posted by sukji

 

 

포스트 코로나 시대의 새로운 대학교육

 

‘팬데믹 온라인 교육’ 버리고 속속 복귀하지만
디지털 문명시대, 새 교육방식 더욱 발전 필요
‘누구나, 편한 시간, 원하는 장소’ 교육 강화해야

 

                                                                      김도연 객원논설위원·서울대 명예교


지금으로부터 꼭 3년 전 번지기 시작한 코로나19로 우리 사회는 패닉에 빠져 있었다. 2020년 동아일보 2월 21일 자 1면 헤드라인은 ‘코로나 국내 첫 사망…확진자 100명 넘었다’였고, 그다음 날은 ‘하루 103명 폭증…신천지 동선 따라 전국 확산’이었다. 그리고 2월 24에는 ‘위기경보 ‘심각’ 격상…모든 학교 개학 연기’였다. 통상 3월 2일이던 개학을 일주일 미룬다고 정부가 발표한 것인데, 그 후에도 개학은 두 번이나 더 미뤄졌다. 그러나 결국 개학은 없었고 모든 학교가 폐쇄되면서 수업은 온라인으로 진행됐다.

아무런 준비도 없었기에 교육담당자 모두가 당황하고 허둥댄 것은 당연했다. 전국 초중등생들은 대부분 EBS 온라인 클래스에 의존했고, 대학에서는 교수들이 강의를 급하게 동영상으로 만들어 일방 송출했다. 모니터에서 학생들이 서로 얼굴을 보면서 질문을 주고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있긴 했지만 교육 효과는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인성교육은 물론이고 지식 전달의 측면에서도 학습 의욕을 고취하기 어려워 학생들 간 학업성취 격차가 심해졌다. 그러나 이번 봄에는 드디어 팬데믹 공포에서 벗어나며 새 학기를 맞는다. 3년 만에 마스크를 벗고 마음껏 어울릴 수 있는 환경이다. 기다리고 기다렸던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크게 아쉬운 점은 우리 교육계 대부분이 지난 3년 동안 쌓은 소중한 경험은 모두 버리고 코로나 팬데믹 이전과 똑같은 모습의 학기를 예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정해진 시간에 학생들을 교실에 모아 일정 시간 가르치고 획일적으로 평가해 성적을 내주는 산업 문명시대 교육이 과연 정답일까? 물론 전통 속에는 지키고 더욱 가꾸어야 할 장점도 많이 있다. 그러나 이제는 디지털 문명시대다. 특히 세계와 경쟁해야 하는 우리 대학교육에는 지킬 것보다 바꿔야 할 것이 더 많은 듯싶다.

미국의 하버드대는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를 이끄는 고등교육 기관이다. 하버드 역시 여느 대학과 마찬가지로 2020년 3월부터 캠퍼스가 폐쇄되면서 모든 학생을 온라인으로 교육해야 하는 전혀 예기치 못했던 상황을 맞았다. 당연히 어려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나 그들은 코로나19로 인해 교수와 학생이 온라인 세상에서 가꾼 대단히 값진 2년간의 교육경험을 분석했다. 그리고 그 결과물로 ‘하버드의 미래교육 및 학습’이란 연구보고서를 작년에 발간했다.

보고서의 결론은 팬데믹과 관계없이 앞으로의 대학교육은 온라인을 더욱 이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무려 82%의 교수들도 과거와 같은 강의실 교육 일변도에서 벗어나 온라인을 함께 이용하는, 소위 블렌딩(Blending) 교육이 학생과의 연대감 및 교육 효과를 높이는 교육방식이라는 사실에 동감했다. 여기서 온라인 교육이란 단순하게 강의 동영상을 학생들에게 제공하는 일이 아니다. 오히려 온라인에서는 소그룹 토론이나 학생들의 학습 의욕을 크게 고취할 수 있는 능동학습(Active Learning)이 더욱 용이하다는 점에 초점을 둔 것이다. 사실 블렌딩 교육은 교수들이 부담을 더 짊어져야 하는 일이다.

개인이나 조직 모두에게 위기는 또 다른 도약의 기회임이 분명하다. 대학교육에 큰 위기를 몰고 왔던 코로나 팬데믹을 그냥 잊고 넘어가면 이는 결국 도약의 기회를 놓치는 것이다. 우리는 코로나19로 인해 성큼 다가왔던 디지털 문명시대의 새로운 교육방식을 더욱 발전시켜야 한다. 최근, 인문학 전공의 교수 한 분은 그간 학생들에게 출제했던 시험 문제를 챗GPT에 주었더니, 즉각 나오는 답변들이 적어도 B+의 성적을 주기에 전혀 부족함이 없었다고 토로했다. 학생이 직접 작성한 답안과 인공지능의 그것을 어떻게 구별할 수 있냐는 물음에 대해서도 챗GPT는 몇 가지 방법을 제시했는데, 그 마지막은 교수가 학생을 만나 직접 토론해 보라는 것이었다.

 

세상은 이렇게 바뀌고 있는데, 우리 대학들은 지금 어디에 있나? 21세기 대학은 누구라도(Anyone), 편한 시간에(Anytime) 그리고 원하는 장소(Anyplace)에서 가르치고 배우는 소위 3A 교육과 학습에 더 많은 정성을 쏟아야 한다. 특히 우리 사회 많은 대학들은 줄어드는 학령인구와 고령화사회에 대비해 평생교육 기관으로 탈바꿈해야 한다. 머뭇거리면 완전히 낙오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디지털 문명시대를 맞은 우리 대학들에 3A 교육을 가꾸는 일은 발전전략이 아니다. 생존전략 그 자체다.

 

 

< 출처 : 동아일보 >

:
Posted by sukji
2022. 12. 9. 10:05

대학의 기업가적 전환을 꿈꾼다 교육.기타2022. 12. 9. 10:05

 

 

대학의 기업가적 전환을 꿈꾼다

 

 

Z세대는 소확행을 하거나
영끌의 위험감수를 통해
파이어족으로 진화하길
꿈꾸는 친구들이 늘지만
학생 창업가들을 위한
제도는 아직 미흡하다

대학은 이제
청년들에게 무언가를
도전하고 실패해 볼
인큐베이션 장으로
진화해야 한다
그래야 그들이 더 커진다

이것이 내가 꿈꾸는
기업가적 대학이다

 

“요즘 서울대학교 학생들 중 가장 똑똑한 친구들이 제일 많이 고민해보는 진로가 뭔지 알아요?” 몇 달 전에 동료 교수가 불쑥 내게 물었다. 그의 대답. “글로벌 기업이나 국내 대기업의 입사도, 고시 합격도 아니래요. 창업이랍니다.”

 

장대익 가천대 창업대학 석좌교수(학장)

 

정말 그럴까? 대학생에게 창업을 본격적으로 가르쳐보겠다며 이직을 준비하던 나에게 격려와 응원의 뜻으로 한 말일 수도 있다. 하지만 실제로 전국 대학생 792명을 대상으로 2021년 6월에 실시한 한 설문조사 결과(알바천국)에 따르면, “취업 대신 창업을 고려한 바 있다”고 답한 친구들이 절반 이상이다. 대학알리미가 2020년에 조사한 바에 따르면 인구 대비 대학생 창업자 비중이 해마다 증가하고 있다.

비슷한 맥락에서 작년 중소벤처기업부의 발표도 흥미로운데, 이에 따르면 국내 벤처·스타트업의 고용 증가율은 국내 전체 기업 고용 증가율보다 세 배가량 높다. 또한 재직자의 전체 규모도 총 69만8000명인 4대그룹보다 3만명 정도가 더 많다. 물론 창업이 취업에 비해 더 선호되는 진로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지만 일부 특이한 사람들의 리그는 더 이상 아니라고 할 수 있다. 왜 이런 변화가 생겼을까?

 

우선 큰 흐름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첫번째 흐름은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다. 인터넷 상용화가 본격화되던 당시, 닷컴 창업은 거대한 물결이었다. 이때의 최강자는 야후 같은 인터넷 포털 기업이었다. 검색 엔진으로 야후를 제친 구글도 1990년대 후반에 태동한다. 이 시기 인터넷 이용자의 행동은 주로 웹페이지를 검색하고 읽는 정도였다. 그 이후 2007년에 스티브 잡스가 아이폰을 들고나오면서 모바일 혁명이 시작된다. 스마트폰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애플의 운영체계(iOS)와 구글의 운영체계(안드로이드)에서 작동하는 앱생태계가 조성되면서 플랫폼 비즈니스의 빅뱅이 일어났다. 2000년대 중반부터 페이스북 같은 사회관계망서비스와 유튜브 같은 동영상 공유 서비스가 등장했고, 공유 플랫폼의 시대가 열린다.

 

이로부터 대략 10년이 경과한 2016년, 딥러닝 기반의 AI와 비트코인 열풍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블록체인 기술 등이 또 다른 비즈니스의 문을 열었다. 이제 이용자는 단지 웹이나 앱에서 읽고 쓰는 정도를 넘어서, 해당 플랫폼의 생태계에 기여한 만큼 데이터에 기반하여 보상을 받을 수 있는, 탈중앙화된 구조 속의 주요 행위자가 될 수도 있다. 이런 세 가지 흐름에 대해 어떤 이들은 웹1, 웹2, 웹3라고 이름을 붙인다. 국내 스타트업 생태계의 역사도 비슷하다. 인터넷 물결을 탄 네이버가 젊은 인재들을 빨아들여 지금의 대기업이 되었고, 모바일 물결을 환호한 카카오도 그랬다.

중요한 것은 이런 새로운 물결이 올 때마다 기존 사고에 깊이 물들지 않은 젊고 유연한 인재들이 서핑을 즐겼다는 사실이다. 이런 맥락에서 모든 것이 디지털화되고 따라서 전 영역에서 디지털 전환이 가능해진 지금이야말로, 어쩌면 가장 큰 파도인지 모른다. 20대 초반의 말랑말랑한 청년들이 스타트업에 뛰어들고 있는 것은 혹시 멀리서 일렁이는 이 거대한 파도를 어렴풋이 보았기 때문일까?

 

새 물결 올 때마다 청년들은 서핑

우리의 역사를 조금 더 이야기해보자. 닷컴 시기에는 벤처창업 태풍이 불었지만 정부나 민간이나 도울 준비가 부족했다. 창업자들을 어떻게 도와야 할지, 자금을 얼마나 어떻게 지원해주는 게 좋을지 우리의 데이터가 없었다. 그래서 수많은 청년들이 벤처의 세계로 진입했다가 큰 좌절과 함께 빚더미에 앉았다. 사회가 신용불량자를 양산한 것이다.

 

하지만 학습력이 빠른 우리는 중소벤처기업부까지 창설하여 창업자 발굴, 교육, 육성, 자금 지원 체계를 만들었고, 이때부터 창업을 해서 열심히 일하면 비록 회사는 망하더라도 최선을 다한 개인들은 신용불량자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런 지원을 받은 일부 스타트업들이 유니콘의 길을 가고 있다. 청년들이 이 거대한 흐름과 생태계 변화를 이해하고 체감했기 때문에 스타트업 생태계에 뛰어드는 것은 아닐 것이다. 그저 창업해서 대박이 난 선배 창업가처럼 되고 싶고, 망해도 빚더미에 앉지는 않을 것이라는 안도감이 생겼기 때문일지 모른다.

 

이것이 지금 대학가에 부는 창업 물결의 거시적 배경이다. 물론 우리 사회만의 특수한 상황도 더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 사회는 자율성이 상당히 부족하다. OECD 국가 중에서 GDP 대비 행복도를 비교해보면 한국은 매우 낮은 위치를 점하고 있다. 즉 잘살기는 하는데 별로 행복하지 않은 것이다. 행복심리학자들에 따르면 자율성 훼손은 불행과 깊은 관련이 있다. 우리의 40~50대 유능한 분들은 대부분 직장에서 상사가 시키는 일을 잘해서 승진한 이들이었다. 이견을 내는 사람들도 인정받고 성공하는 문화는 아니었다.

 

이 광경을 Z세대는 도저히 받아들일 수가 없다. 자신이 하고 싶지 않은 일을 꾸역꾸역 하는 모습이 혐오스럽기까지 하다. 그냥 자신이 하고 싶은 거 하면서 소확행을 하거나, 영끌의 위험감수를 통해 파이어족으로 진화하는 것을 꿈꾸는 친구들이 늘고 있다. 이런 맥락에서 스타트업은 청년들에게 매력적인 대안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런 모험적 학생 창업가들을 위한 제도는 아직 미흡하다. 대학 1, 2학년 때 창업을 결심하고 창업가의 길을 가고 있는 청년들을 본 적이 있는가? 창업을 하다 보니 전공 공부를 따라가기 점점 힘들어져서 졸업장을 딸 수 있을지 걱정하는 친구들이 의외로 많다. 창업을 해서 열심히 일했다고 졸업시켜주는 대학은 거의 없으니까. 하지만 생각해본다.

스스로 팀을 만들고 창업을 해서 사활을 걸고 학습하고 실행하는데, 이것만큼 살아있는 공부가 어디 있겠는가? 가장 능동적인 학습과 교류를 하고 있을 시기일 텐데, 이들을 대학에서 내치거나 창업 휴학제 시행 정도로 제적을 연기시켜주는 것이 과연 답일까?

 

대학, 교육을 넘어 기업가적 전환

창업 교수들에게도 비슷한 문제가 있다. 정부와 대학이 교원 창업을 격려하고 지원해준다고 하지만, 실제로 창업을 하고 나면 일이 복잡해진다. 대학의 고유 업무(교육과 연구)로부터 자연스럽게 멀어지기 쉽기 때문이다. 그래서 창업은 주로 종신교수직을 받은 정교수들의 몫이다. 아이디어와 실행력이 뛰어난 젊은 교수들은 승진에 문제가 생길까 봐 창업을 꺼리는 경향이 있다. 창업 휴직제를 도입한 학교도 늘어나고 있지만, 근본적 해법은 아니다.

 

나는 500년 전에 ‘교육’으로 시작한 대학이 100년 동안 ‘교육과 연구’의 패러다임으로 진화해왔으나, 이제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넘어가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기업가적 전환’이다.

이제 창업은 실리콘밸리의 몇몇 대학만의 주제가 아니다. 내가 보기에 이것은 대학의 진화 단계에서 새로운 패러다임이다. 평균 수명 100세를 준비하는 이 시대에 기존의 대학 시스템은 기껏해야 첫번째 직장 정도에 영향을 주는 교육기관일 뿐이다.

대학이 테크놀로지와 수명의 급격한 변화에 적응하려면 청년들에게 스스로 무언가를 도전해보고 실패해볼 수 있는 인큐베이션 장으로 진화해야 한다. 나는 이것을 대학의 ‘기업가적 전환’이라 부르고자 한다. 이것은 대학이 기업이 되라거나 기업에서 써먹을 인재를 교육하는 기관으로 가야 한다는 얘기가 아니다. 대학이 교육과 연구 기관을 넘어 구성원들이 기업가적 정신을 발휘하고 경험해볼 수 있게끔 진화해야 한다(하고 있다)는 뜻이다.

 

대학생들의 공부를 보자. 중학교, 고등학교 총 6년 동안 대학 입시를 위한 문제집을 풀다 들어온 우리 아이들이 기업 입사를 위해 다시 4년간 교과서의 문제를 풀고 있지 않은가. 그들의 입장이 되어보라. 정말 지겹지 않겠는가. 이게 과연 대학에 와서 하고 싶었던 공부일까? 좌절하지 않겠는가.

 

개인 또는 팀으로 해결하고자 하는 문제를 스스로 발굴하고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1~2년을 능동적으로 배우고 경험할 수 있는 장을 마련해준다면 그들은 지금보다 훨씬 더 성장할 것이다. 순위가 더 높은 대학에 또다시 진학하기 위해 문제집을 펼치는 일은 줄어들 것이다. 이것이 내가 꿈꾸는 기업가적 대학이다. 이것이 내가 서울대라고 하는 안전지대를 떠나 가천대학 창업대학으로 가게 된 이유이다.

 

< 출처 : 경향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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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ukj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