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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 진정한 배움이 있는가

 

 

우리 사회가 잃어버린 언어


 

  

 

간혹 대화가 막히거나 어색한 이유는 서로의 언어가 다르기 때문이기도 하다. 언어는 곧 관심이다. 우리의 관심은 어떤 언어를 선택한다. 그리고 선택하여 사용하는 언어들은 우리의 의식을 형성하고 문화가 된다. 그 언어들은 우리의 의식을 지배하고 조정한다. 가령 돈에 관계되는 언어들을 자주 사용하는 사람들의 주된 관심은 곧 돈일 것이다. 때문에 돈으로 사람과 사람의 관계를 해석하고 행동할 것이다. 관심과 언어의 악순환이다.

 

지금 우리 사회는 온통 ‘돈’의 언어가 넘쳐나고 있다. 돈에서 파생된 신종 언어를 보면 얼마나 돈이 득세하고 있는지 알 수 있다. ‘돈’ 그 자체가 선과 악의 본질은 아닐 것이다. 돈에 대한 시선과 해석이 돈을 천사로 만들고 악마로 만든다. 문제는 그 ‘돈’의 언어가 다른 언어들을 밀어내고 있다는 점이다. 돈이 우리 삶에 꼭 필요하고 소중한 언어들을 낯설게 하고 있다.

 

돈의 득세와 위력으로 밀려나고, 희미해지고, 낯설어진 언어들을 생각해 본다. 하나하나 끄집어내 보니 참 많다. 그중에 ‘훌륭하다’는 말이 이에 해당하겠다. ‘훌륭하다’는 국어사전에 보면 ‘썩 좋아서 나무랄 것이 없다’는 뜻이다. 마음가짐과 마음 씀씀이, 이를 바탕으로 능력도 뛰어난 사람을 일컫는다. 훌륭한 선생님, 훌륭한 인격자, 훌륭한 학생…. 참 영광스럽고 자랑스러운 수식어이다.

 

그런데 언제부턴가 이 ‘훌륭’이란 언어가 ‘성공’이란 언어에 밀려나갔다. 무한히 많이 가지고, 높은 자리에 오르고, 오래도록 독점하는 함의를 가진 성공이 사회 전면에 출현했다. 그 ‘성공’이 위력을 떨쳐 나갔다. 그 위세 앞에 맑고 향기로운 언행을 가진 사람, 정직하고 성실하게 사는 사람, 지식과 신념을 돈과 권력에 팔지 않는 사람, 늘 나와 이웃을 한 몸으로 살아가는, 그런 ‘훌륭한’이라는 언어가, 세력을 잃어가는 시절에 우리는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훌륭한’과 어울렸던 언어들이 하나하나 함께 잊히고 낯설게 되었다. 이제는 인성, 인품, 인격이라는 말이 돈과 성공이라는 말에 밀려 사회 전면에서 퇴장한 지경이 되었다.

 

조용히 생각한다. 우리 시대를 가꾸는 언어를 복원하고 생성해야 하는 텃밭이 어디인가를. 겸허하게 답한다. 그곳은 바로 진리와 지성의 전당인 대학이라고. 다시 엄중하게 묻는다. 오늘의 대학은 언어의 오염을 막아내고 생명 본원의 언어를 생성하는 진리 탐구와 지성을 연마하고 있는 배움터인가를. 겸허하게 답해야 한다. 아니다, 아니다, 아니다, 라고.

 

무엇보다도 언어의 오염과 실종, 굴절이라는 비상경보가 울리고 있는 곳은 대학이다. 그런데 그 대학에서 경보음을 듣지 못하고 있다. 소중한 언어가 대학에서부터 실종되고 있는데도 말이다. 대학에서 실종된 언어는 무엇인가. 자유, 정의, 진리, 우정, 사랑, 헌신, 지성은 대학의 주요 교훈이다. 그러나 오늘의 이렇게 ‘훌륭함’으로 집약되는, 대학의 건학 이념은 한낱 치장이 되었다. 대신 수상하고 불순한 언어들이 대학을 점령하고 있다. 실적, 순위, 취업, 예산, 기부, 조작, 줄 세우기, 성폭력, 정치 등의 언어들이 음과 양으로 포진해 있다. 이들 언어는 대학 당사자가 ‘돈’을 위한, 또는 돈을 버는 능력과 연줄을 생산하기 위한 수단과 목적으로 집약되어 있다. 한마디로 자본의 노예가 되어 있다고 하겠다. 

 

“대학의 교훈들, 예를 들면 ‘진리는 나의 빛’(서울대), ‘자유·정의·진리’(고려대), ‘지덕겸수 도의실천’(원광대)은 얼마나 뜻깊은 언어들인가. 삶과 공동체에 필수적인 이러한 가치를 내건 한국 대학들은 사회를 분열로 몰아넣는 자본의 논리로 무장하고 있다. 대학마다 주차장은 유료며 프랜차이즈 점포들이 즐비하다. 또한 정부 연구비에 목을 매며 피눈물 나는 경쟁에 뛰어든다.”

❶ 오늘의 대학의 위기를 짚어내고 있는 글이다.

 

대학은 글자 그대로 큰 배움터이다. 배움은 언어와 삶의 일치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불순한 관심사는 대학의 언어를 교체했다. 고전 《대학》은 삼강령 팔조목(三綱領 八條目) ❷을 교육의 골간으로 삼고 있다. 이 강령과 조목의 언어들의 지향을 살펴보자. 언어의 실종을 읽어내지 못하고 있는 대학, 진정 대학 교육의 위기가 아니겠는가?

 

월간참여사회 2019년 1-2월 합본호(통권 262호)

 

❶원익선 교무 <경향신문> 2018년 12월 21일자 칼럼

❷삼강령은 《대학》의 세가지 강령으로 명명덕(明明德), 천민(親民), 지어지선(止於至善)을 말하며

 팔조목은 격물(格物), 치지(致知), 성의(誠意), 정심(正心), 수신(修身), 제가(齊家), 치국(治國), 평천하(平天下)를 말함.

 

* 이 글은 참여연대가 발행하는 월간 <참여사회> 1월호에서도 볼 수 있습니다.

 

< 출처 : 한겨레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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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ukj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