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7. 12. 09:59
함부로 대하지 않는 마음이 사람과 지구를 구한다 교육.기타2023. 7. 12. 09:59
함부로 대하지 않는 마음이 사람과 지구를 구한다
〈쓰레기 영웅〉과 사라진 쓸모를 찾는 여정
2022년 발표된 유엔 기후변화에 관한 정부 간 협의체(IPCC) 6차 보고서는 기후 비극을 막을 골든타임이 30개월밖에 남지 않았다는 충격적인 내용을 담고 있다. 작은 실천이라도 해보겠다며 배달 음식은 시켜 먹지 않고 불필요한 소비를 최소화하려 애써보지만, 어느새 수북이 쌓이는 쓰레기를 바라보거나 카드명세서를 확인할 때면 절로 한숨이 나온다. 쓰레기 더미 앞에서 가벼운 죄책감이나 윤리적 피로감 대신, ‘너도 나처럼 쓸모가 없어졌구나’라며 쓰레기에 감정 이입한 적이 있었던가. 정크아트 작가로 쓰레기를 통해 환경 이슈를 다루면서 인간의 ‘버려진 마음’을 함께 얘기해온 구형승 작가의 작업은 어떤 마음으로 시작된 걸까.
정크아트 작가, 예술가, 예술교육가, 사회혁신가, 예술혁신단체 대표 등 다양한 이름으로 활동 중인 그는 자신을 대표하는 얼굴로 사회혁신가를 꼽는다. 유년 시절부터 한일 다문화가정에서 태어나 정체성의 큰 혼란을 겪으면서 일상적인 차별과 폭력에 노출되어 왔는데, 그 고리를 끊어내기 위해 고등학생 시절 임원 선거에 나가 본인의 신념을 분명히 하며 압도적 표 차로 선출된 경험이 있다. 돌이켜보면 이때 스스로 변화를 이뤄내는 자신 안의 힘을 자각하면서 사회혁신가의 길로 들어서게 되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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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Trash, Human〉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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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레기, 인간〉
나를 살려낸 예술, 정크아트
대학 2학년 무렵 심각한 우울증이 찾아와 거의 1년간 집 밖을 나가지 않는 은둔형 외톨이 생활을 했다. 노력이 성과로 연결되지 않는 시간 속에서 무기력증은 쌓여갔고 노력이라는 말이 무서워졌다. 끝없는 경쟁을 헤치며 성과를 증명해야 하는 사회, 쓸모없는 존재가 되어 깊은 우울의 망망대해에서 허우적댈 때, 그를 구원한 것은 방 안에 뒹굴던 배달음식 쓰레기 더미였다. 어느 날 이걸로 뭔가 좀 바꿔볼까 싶어 사부작사부작 만들면서 정크아트 세계를 만났고, 혼자 작업하기 힘들어서 찾아간 여러 자조모임을 통해 우울증의 늪에서 서서히 빠져나왔다.
“인간의 쓸모가 사라지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사회가 버리는 쓰레기가 그걸 전달하기에 매력적인 오브제라는 생각이 들어서 정크아트를 시작하게 되었어요. 쓰레기로 조형작업을 하는 것만이 아니라, 인간의 쓸모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 자체가 정크아트라 생각합니다. 사람이 버려지는 사회에 관해 얘기하고 싶고, 가능하다면 비즈니스를 통해 변화도 만들고 싶어요.”
– 구형승 작가
이런 생각에 공감하는 사람들과 팀 작업을 통해 정크아트 전시회도 열고 사진이야기 책〈쓰레기, 인간〉도 제작했다. 정크아트의 치유적 효과를 믿으며 작업하던 중, 뜻밖의 딜레마를 발견했다. 환경 메시지를 전달하기 위해 버려진 쓰레기로 작업했지만, 그냥 두면 재활용 쓰레기인 것을 글루건이나 아크릴 물감을 사용하면서 오히려 환경을 파괴하는 일반쓰레기를 만들어내고 있었던 것.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쓰레기 이야기를 소재로 상상하며 문학이나 애니메이션으로 작업을 확장하기도 하고, 재료 자체를 환경에 무해한 것으로 바꿔보려 애썼다. 특히 예술교육 프로그램으로 진행했던 쓰레기 영웅 시즌 2 〈쓰레기 영웅의 그림책〉은 그림책이 가진 상호작용성에 주목한 사례다. 예술교육은 관계가 내용만큼이나 중요한데, 그림책이라는 매체는 구체적 스토리와 시각 작업이 같이 들어가면서 보는 사람도 이야기하기 편하다는 특별한 강점이 있다.
사람이 버린 게 사람의 마음을 구한다
폴란드 작가 올가 토카르추크는 “다정함이란 대상을 의인화해서 바라보고, 감정을 공유하고, 끊임없이 나와 닮은 점을 찾아낼 줄 아는 기술”이라 했다. 〈쓰레기 영웅의 그림책〉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과연 쓰레기에 감정 이입하면서 ‘다정한 서술자’가 되어봤을까?
어린이 청소년부터 직장인까지 다양한 참여자들이 이 프로그램을 함께했다. 아직 자신의 쓸모에 대해 고민이 깊지 않은 어린이들은 환경 이슈 중심으로 흥미로운 애니메이션 결과물을 만들어냈다. 아이들은 깨진 도자기의 쓸모를 찾아가면서 개미들의 우산이나 집을 만들어주는 따뜻한 장면을 상상해낸다. 자신의 쓸모에 대해 아픔이나 고민이 있는 청소년과 성인들은 예상치 못한 감동과 위로의 순간을 만나기도 한다. 뭐든 쉽게 빨아들이지만 금세 더러워져 버려진 스펀지를 보고 타인의 말에 중심 없이 흔들리며 자책이 일상인 자신을 떠올리게 된다든지, 아직 멀쩡한데도 더 좋은 기능을 탑재한 신제품 탓에 밀려난 충전기는 여전히 일할 수 있고 일할 의지도 있는데 회사에서 뒷전으로 물러난 ‘나’처럼 보인다. 쓰레기에 내 마음을 이입하는 게 쉽진 않지만, 쓸모에 관해 얘기하고 글과 그림으로 표현하면서 왈칵 울음을 쏟기도 하고 서로가 귀 기울이면서 위로와 연대의 힘을 확인한다. 그저 부정적 감정이 해소되어 좋았다 차원이 아니라, 스스로 나의 쓸모를 정의하면서 잃어버린 에너지를 바로잡는 마법 같은 현상이 나타나기도 한다.
“주변 친구들은 전부 취업을 해서 정해진 월급을 받으면서 안정적으로 살아가는데, 저는 올해 겨우 폐업을 면했습니다. 이렇게 제대로 해내지도 못할 거면서 사업을 왜 시작한 건지 제 자신이 한심하고 쓸모없게 느껴졌습니다. 이 프로그램을 통해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불안함과 걱정들을 그림과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털어놓을 수 있어서 정말 속 시원했고, 저에 대해 돌아보면서 제가 열심히 잘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 참여자 리뷰 중: Z, 25세 남자, 사업자
쓰레기 영웅(Trash Human) 캐릭터는 ‘시즌 2 그림책’과 ‘시즌 3 쓰레기 왕국’을 거치면서 버려진 인간의 마음을 구하는 긍정의 에너지를 파워업하는 중이다. 구형승 작가는 인간의 형태를 가진 쓰레기 더미를 오래전부터 구상했고, ‘세상이 버린 쓰레기가 인간을 구한다’는 핵심 메시지를 구현하고 싶었다고 한다. 자신의 예술은 우울증과 부정적 마음에서 시작했지만 결말은 우리의 쓸모를 회복하고 삶의 활력을 찾을 수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예술교육에 접근했다. 귀엽고 다정한 쓰레기 영웅 캐릭터는 최신식 무기 대신 붓이나 연필 등 예술도구로 무장하고 사람의 마음을 구하려 한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쓸모없다고 함부로 대하지 않는 마음이 사람을, 나아가 지구를 구할 수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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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즌 3 쓰레기 왕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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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무지개 열매〉(쓰레기 왕국 어린이 작가 유도훈)
‘일단 믿는 마음이 중요해. 그다음에 찾아보는 거야. 그래도 찾을 수 없을지도 모르지.’
*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드라마 〈고잉 마이 홈〉중
최근 코로나 엔데믹이 공식 선언되었지만, 코로나19 여파는 아직도 진행형이다. 전 지구적으로 기후 변화, 사회적 고립과 단절, 양극화 등 이제껏 경험하지 못했던 3년의 시간이 흘렀는데 아무 일도 없었던 듯 일상 회복이라는 이름 하에 과거로 돌아갈 순 없다. ‘낡은 것은 갔지만 새 것은 아직 오지 않은’ 이 시기에 문화예술교육 현장에서도 되돌아볼 순간들이 꽤 있을 것이다. 그중 하나로 코로나19와 함께 비대면 문화예술교육이 대안으로 떠오르면서 참으로 많은 키트가 만들어지고 배포되었던 상황을 들 수 있다. 대면이 아예 불가능했던 때였으니 아쉬운 대로 효과가 있었다고 봐야 할지, 새로운 가능성을 찾았다고 해야 할지, 오히려 재활용도 안 되는 또 다른 쓰레기만 양산한 건 아닌지 생각이 많아진다.
구형승 작가는 예술교육 키트 상품 개발을 위한 사전 조사 차원에서 그동안 공공 지원으로 이루어진 여러 사례를 검토한 적이 있는데, 나름의 의미에도 불구하고 판매용 상품 개발에 참고하기에는 아쉬움이 있었다고 한다. 〈쓰레기 예술 그림책 키트〉개발을 위해 미술치료사 자문을 받으면서 8개월 간 기획개발에 힘을 쏟았다. 무엇보다 정크아트 키트 상품인 만큼 환경에 해를 끼치지 않도록 재생지와 콩기름을 사용하고, 커피 찌꺼기 연필, 색종이 재활용 색연필, 흙 크레파스 등 다양한 소재를 도입했다. 2022년 서울 도봉구 혁신가 지원사업을 통해 개발했고, 모의펀딩대회에서 5,330만 원이라는 거액의 가상 투자금을 유치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제 텀블벅 펀딩으로는 백만 원 남짓 모였으니 ‘모의’와 ‘실제’의 괴리가 너무 컸다. 브랜딩도 열심히 했고 수백 명의 교육 참여자 피드백을 거쳐 만들었기에 자신 있었는데 냉정한 현실에 충격을 받았다. 사회적 가치를 응원하는 것과 실제 구매 사이에 아직 갈 길이 멀다.
“솔직히 멘붕 왔죠. 여전히 정답은 모르겠지만 깨지더라도 계속 들이받고 싶어요. 제 목표가 공공 지원에 너무 기대지 않고 자생성을 갖추는 거예요. 영업은 필수죠. 백화점 문화센터, 대기업 출강 건으로 제안서 보내면 몇몇 곳에서 실제 요청도 들어옵니다. 캐릭터 중심으로 예술콘텐츠 팬층을 만들면서 수익구조 다각화 작업도 계속할 겁니다. 흔히들 사회혁신 분야는 2년 넘기기 쉽지 않다고 해요. 돈이 되는 것도 아니고 비전도 잘 안 보이고 설득하기도 힘드니까. 그런데도 5년 동안 제가 이 분야에서 활동하고 있는 건 이 일을 사랑하는 마음, 진심 때문이거든요.”
– 구형승 작가
쓸모로 증명되지 않아도 괜찮아
2020년에 제작된 〈Trash, Human〉 영상은 매우 암울하다. 생각해보면 ‘쓰레기 인간’이든 ‘인간 쓰레기’든 ‘쓰레기’라는 단어에 ‘인간’을 붙이는 순간 인간 말종을 의미하는 욕이 된다. 끝없이 생산하고 소비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 역시 쓸모로 평가받기에, 효용이 다한 쓰레기로 인간이 비유되는 순간 인간 존재 이유가 사라지기 때문이리라. 최근 챗GPT 등 ‘폭주하는 AI가 뒤흔든 인간의 자리’를 걱정하는 소리도 많이 들린다. 쓸모로 증명되지 않더라도 인간이 인간일 수 있는 조건은 무엇일까.
20대 사회혁신가가 꿈꾸는 세상은 소박하다. 내가 우울하거나 슬픈 걸 숨기지 않고 쉽게 얘기하고 치료받을 수 있는 사회, 회사에서 지친 하루를 마치고 돌아왔을 때 유튜브 보면서 혼밥으로 마무리하기보다는 누구나 작은 예술작업을 하며 삶의 힘을 얻을 수 있는 세상. 아픈 마음을 다독여줬던 예술의 힘을 더 많은 이들이 느끼길 바라는 그의 건강한 욕심을 응원한다.
이선옥 한량처럼 살고 싶은 소음인. 하자센터,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 예술경영지원센터를 거쳐 수원문화재단 책문화부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2004년 문화예술교육 허브사이트 ‘아르떼’와 ‘웹진땡땡’을 만든 시조새였던 이유로 웹진 [아르떼365] 편집위원을 맡고 있다.
dal0310@naver.com
페이스북 @sonok.lee
< 출처 : 아르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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