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미디언 유병재, 방송인 유병재, 작가, 유병재, 크리에이터 유병재……! 2014년 SNL에서의 첫 등장 이후 유병재라는 이름 앞에 따라오는 타이틀은 변화를 멈추지 않는다. 그러나 삶의 어떤 단계에서든, 메모를 멈추지 않고 묵묵히 글을 쓰는 ‘작가’로서의 그는 늘 같은 모습이다. 《블랙코미디》 이후 3년 만에 출간되는 유병재의 『말장난』에는 짧고 깊이 있는 삼행시들이 201편 담겨 있다. 제목부터 마지막 에필로그에 이르기까지 한없이 가벼운 듯 묵직한 글들로 가득한 한 권의 책 안에서, 독자들은 눈물을 웃음으로 극복하고, 굳이 한계를 설정해 그 안에서 뛰어노는, ‘진지’와 ‘유머’ 모두를 갖춘 작가 유병재를 만날 수 있다.
“이전의 책 농담집을 ‘코미디언’으로서 썼다면 이번 책은 스스로 ‘감정 대리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써봤어요. 그러다 보니 주변에서 공감할 만한 단어들 위주로 수집하게 되었습니다.” -작가 인터뷰 중에서
삼행시 달인이라고도 불리는 작가 유병재에게는 현실을 둘러싼 모든 낱말들이 표제어가 된다. 가족, 관계, 직장부터 기쁨, 절망, 분노 등, 우리 주변의 이야기와 그로부터 우러나는 감정들이 짧은 문장 안에 뿌리내리고 있다. “단 한 사람에게라도 어설픈 위로보단 단순한 응원으로 남기를” 바라는 그는, 어느 때보다 불확실하고 빠르게 변화하는 시간을 사는 우리에게 딱 필요한 감정 대리인일지도 모른다.
《말장난》은 표지부터 글까지 작가 유병재를 쏙 닮았다. 띠지를 벗기면 보이는 유병재의 얼굴 이미지부터 소심한 듯 솔직한 듯, 웃음이 많은 듯 진지함이 가득한 글들이 지은이의 정체성을 고스란히 옮겨놓은 것만 같다. 그런데 읽다 보면 마치 내 이야기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책의 서두에서 작가는 말한다. “왼손 손바닥을 보면 손금 모양에 ‘시’라고 적혀 있어 인간은 누구나 시를 쓰며 살아가야 하는 존재라는 누군가의 구라가 떠오릅니다.” 그 말대로라면 우리는 누구나 시인인 셈이다. 매일 실수하고 소심하게 움츠러들기를 반복하지만, 각자 자신만의 단어로 자신을 표현하길 원하지 않는가. 속 시원하게 울고 웃고 화내고 소리 지르며 감정을 내질러야 하는 우리기에, 순한맛, 중간맛, 매운맛이라는 부제목에 따라 인간의 온갖 감정을 담아놓은 이 작은 삼행시집에 공감하고, 그것을 또 다른 누군가와 나누고 싶어진다.
새로 사귄 고민들, 벽돌 되어 머리맡에. (새벽) 치졸한 것들에 시달리다가 맥추는 유일한 시간. (치맥) 시발, 간다고 말 좀 해주지. (시간) 비록 몸은 떨어져 있지만, 대화가 불편하긴 하지만, 면 년 후면 우리는 오늘을 추억할 수 있을 거예요. (비대면)
가볍게 웃어넘길 수만은 없는 짧은 글 속에 사람들이, 그 마음들이 있다. 모두가 잠든 시간에 혼자 고민하고, 황당한 배신에 분노하고, 치맥으로 지친 마음을 달래며, 거리를 둔 채 서로 위안하는 모습들……. 말장난인 듯 아닌 듯 가슴 어딘가에 턱턱 걸리는 문장 하나하나에 오늘도 우리는 마음을 달랜다. 책의 말미에서 작가는 말한다. 단 한 사람에게 단 한 줄이라도 의미 있는 글이 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히 행복하겠노라고.
* TMI 하나, 《말장난》의 띠지를 벗기면 작가 유병재의 얼굴이 보인다. 2018년 유병재 그리기 대회 최우수상에 선정된 김유정 님의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