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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화와 AI가 만났을 때…일자리 지도는 어떻게 바뀔까

[더 나은 사회]
세계화와 로보틱스의 동시적 진행
볼드윈, ‘글로보틱스 격변’이라 정의
원격지능과 인공지능의 세상 그려내

글로벌 가치사슬도 변화 흐름 뚜렷
이제는 데이터 흐름이 세계화 주도

선진국 서비스 부문에 집중된 압력
과거 전환들과는 근본적 차이 보여

 

 

인공지능 기술이 발전하면서 선진국 서비스 부문 일자리를 위협할 것이라는 우려가 커지고 있다. 사진은 케이티(KT)가 인천공항에 설치한 무인 로봇카페 ‘비트’의 모습. 연합뉴스 


 

#에밀리 드라이퍼스는 미국의 정보기술 전문지 <와이어드> 기자다. 동부 보스턴 주재기자인 에밀리는 서부 샌프란시스코에 자리 잡은 본사 편집국의 회의에 늘 ‘참석’한다. 영상통화? 천만에. 비밀은 가상현실 기술을 적용해 원격 현장감(telepresence)을 높인 로봇에 있다. 편집국을 돌아다니는 로봇을 조종하는 건 6천㎞ 이상 떨어진 보스턴의 에밀리다.

#‘코인’(COIN). ‘계약지능’(Contract Intelligence)의 줄임말인 코인은 투자은행 제이피모건이 2016년 말 ‘채용’한 비서다. 인공지능 소프트웨어를 탑재한 이 똑똑한 비서는 예전엔 회사의 수많은 고학력 동료들이 연 36만시간을 들여 처리하던 자료 검색 및 처리 업무를 단 몇초 만에 해치운다.

원격지능(RI·Remote Intelligence)과 인공지능(AI)을 각각 상징하는 두 이야기는 일터에서 진행 중인 디지털 전환의 현주소를 보여주는 사례다. ‘지금, 거기(에도) 있음’이 특징인 원격지능의 시대에 물리적 거리는 의미를 잃기 마련이다. 나날이 발전하는 인공지능 기술은 전문서비스직 일터를 꿰찬 화이트칼라 로봇의 다른 얼굴이다. 인공지능 시대의 세계화. 세계화가 인공지능을 만났을 때, 세계 경제는 어떤 모습을 띠게 될까? 일자리 지도는 어떻게 바뀔까?

 

‘건당 고용 모델’ 자리 잡나

스위스 제네바의 국제개발연구원(IHEID) 교수인 리처드 볼드윈이 최근 출간한 <글로보틱스 격변>은 해답의 실마리를 제공한다. 볼드윈은 세계화와 자동화 두 변수의 조합에 따라 끊임없이 변해온 세계 경제 질서가 최근 또 한번의 격변을 경험하는 중이라며, 이를 ‘글로보틱스’로 정의했다. 세계화(글로벌라이제이션)와 로보틱스(로봇공학)를 합친 단어다.

볼드윈이 눈여겨보는 대목은 작업 방식의 변화다. 정보통신기술(ICT) 발전에 따라 선진국의 제조업 일자리뿐 아니라 일부 서비스 부문 일자리가 개발도상국으로 옮겨간 건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콜센터 일자리가 대표적. 하지만 현실의 행보는 저만치 앞서나가고 있다.

대표적인 프리랜서 일자리 연결 플랫폼인 ‘업워크’(Upwork)를 예로 들어보자. 지원자(노동력 제공자)가 세계 어느 곳에 있든지 간에 플랫폼을 통해 간단한 절차를 거쳐 엔터키만 누르면 계약이 성사된다. 태스크래빗(TaskRabbit) 파이버(Fiverr) 크레이그리스트(Craiglist) 피플퍼아워(PeoplePerHour) 프리랜서닷컴(Freelancer.com) 등 일자리 연결 플랫폼은 차고 넘친다. 건당 유료시청(pay-per-view) 모델에 비견되는 ‘건당 고용 모델’인 셈이다. 영국 옥스퍼드대학 연구팀이 실태조사를 해보니, 이들 플랫폼을 통해 일자리를 얻는 노동자 가운데 미국과 유럽 등 선진국 출신은 8분의 1에 그쳤다.

언어 장벽을 무너뜨리는 기계번역 기술과 원격 현장감 기술의 발전은 이런 흐름에 날개를 달아준다. 볼드윈은 이런 현상이 선진국의 저임금 서비스 일자리 일부를 아웃소싱하거나 개도국의 노동력이 일자리를 찾아 선진국으로 밀려들던 과거의 양상과는 질적으로 다르다고 강조한다. 개도국 노동력이 선진국의 사무실 안으로 ‘일시적으로’ 이민해오는 것과 마찬가지인 까닭이다. 물리적 공간을 이동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원격이민’(telemigration)이라 이름 붙인 배경이다.

 

영국의 브렉시트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당선의 밑바탕엔 노동시장의 구조 변화에 대한 영국과 미국 노동자들의 불만이 깔려 있다는 지적이 많다. 사진은 지난 1월 런던 중심가에서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는 모습. 런던/로이터 연합뉴스
영국의 브렉시트와 미국의 도널드 트럼프 당선의 밑바탕엔 노동시장의 구조 변화에 대한 영국과 미국 노동자들의 불만이 깔려 있다는 지적이 많다. 사진은 지난 1월 런던 중심가에서 브렉시트에 찬성하는 시민들이 시위를 벌이는 모습. 런던/로이터 연합뉴스

 

지식서비스 산업 ‘교역 집약도’ 높아져

약 250년 전 산업혁명의 불길이 처음 댕겨진 이래 세계 경제는 몇차례 커다란 전환을 경험했다. 지금 눈앞에서 벌어지는 글로보틱스 격변이 과거의 전환들과 다른 점은 무엇일까. 볼드윈은 서비스 부문과 직결돼 있고, 세계화와 자동화가 동시에 진행돼 충격을 증폭시킨다는 점에 주목한다. 기술 발전의 충격을 흡수할 공간을 더는 남겨두지 않는 방향으로 몰아치고 있다는 얘기다. 산업혁명 이래 20세기 중반까지 장구한 세월 동안(‘거대한 전환’) 끊임없이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를 만들어냈거나, 1970년대 무렵부터 본격화한 또 다른 전환(‘서비스 전환’)에서 선진국의 서비스 부문이 격변의 압력으로부터 한발 물러서 있던 것과는 분명 대비된다.

이런 엄연한 현실은 세계화에 대한 우리의 낯익은 생각마저 뒤흔들고 있다. 세계화의 성격이 근본적으로 변하고 있어서다. 세계화의 최신 해부도가 증명한다. 매킨지글로벌연구소가 올해 초 발표한 ‘이행기의 세계화’ 보고서를 보면, 2000~2017년에 글로벌 가치사슬 구조는 더욱 지식집약적인 색채로 탈바꿈한 것으로 나타났다.

매킨지글로벌연구소는 43개국 23개 산업을 크게 6개 유형으로 나눠 산업별 글로벌 가치사슬의 변화를 분석했다. 6개 유형은 △글로벌 혁신형(화학·자동차·컴퓨터/전자 등) △노동집약적 재화형(섬유·가구 등) △지역공정형(식음료·제지/인쇄·유리/세라믹 등) △자원집약적 재화형(농업·광업·에너지 등) △노동집약적 서비스형(도소매·운송/창고 등) △지식집약적 서비스형(전문직·금융·IT서비스 등)이다. 보고서를 보면, 산업별 전체 생산 대비 수출 비중을 뜻하는 교역 집약도가 2007년 이후 거의 모든 산업 유형에서 낮아졌다. 이와는 달리 아이티서비스와 전문서비스직 등 지식집약적 서비스형 산업에서의 교역 집약도는 높아졌다.

 

미국 정보기술 전문지 ‘와이어드’ 본사 건물 안을 로봇 ‘엠봇’이 돌아다니고 있다. 엠봇은 가상현실 기술을 적용해 원격 현장감을 높인 로봇이다. 인스타그램 갈무리
미국 정보기술 전문지 ‘와이어드’ 본사 건물 안을 로봇 ‘엠봇’이 돌아다니고 있다. 엠봇은 가상현실 기술을 적용해 원격 현장감을 높인 로봇이다. 인스타그램 갈무리

 

세계 경제 ‘거대한 수렴’ 계속될까

실제로 전 세계 총생산(GDP) 대비 재화·서비스 및 금융의 글로벌 이동 규모 비중은 2014년 39%로, 2007년(53%) 정점을 찍은 뒤 내리막길을 걷고 있다. 대신 그동안 주목받지 않았던 새로운 형태의 글로벌 흐름이 빈자리를 빠르게 꿰찼다. 전자상거래·검색·동영상 등의 얼굴을 한 데이터(지식정보)의 흐름이 주인공이다. 2005~2014년 10년 사이 데이터의 글로벌 이동 규모는 45배나 급증했다. 21세기 초반까지 세계화의 전형적 양상이던 재화·서비스 및 금융의 이동과는 다른,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과도 같은’ 지식정보의 세계화가 거침없이 진행되고 있는 셈이다.

문제는 ‘디지털 세계화’가 불러올 파장. 볼드윈이 말한 세계 경제의 ‘거대한 수렴’(great convergence)이 계속될지 여부가 관건이다. 단순하게 말해 세계화는 여러 비용의 함수다. 재화를 멀리 옮기는 운송 비용이 낮아지면서 세계화는 시작됐다. 하지만 제조과정에 드는 ‘커뮤니케이션 비용’은 산업화에 앞선 나라들에서 이뤄진 기술 혁신의 열매가 그들 나라 내부(제조업)에만 머물게끔 했다. 대략 1820~1990년 사이 세계 경제가 선진국과 개도국의 격차가 벌어지는 ‘거대한 분기’(divergence·발산)를 경험한 배경이다.

20세기 중후반 정보통신기술의 비약적 발전은 정반대의 흐름을 낳았다. ‘아이디어(노하우) 이동 비용’이 낮아지자 선진국의 제조공정은 개도국으로 하나둘씩 옮겨갔다. 전 세계 제조업 생산에서 주요 7개국(G7)이 차지하는 비중은 1990년 65%에서 2014년엔 47%로 낮아졌다. 선진국과 신흥 시장의 수렴이 나타난 것이다. 앞으로 인공지능과 원격 현장감 기술 등이 꾸준히 발전하며 ‘대면(face-to-face) 비용’까지 급속도로 떨어뜨린다면? 현재의 수렴 현상이 이어질 가능성에 일단 무게가 실린다.

이 과정에서 선진국 등 산업화에서 앞선 나라들의 혼돈은 자연스러운 수순이다. 금융위기 이후 미국 정보산업 부문 일자리 추이는 시사하는 바 크다. 퇴직과 해고 등 일자리를 떠난 이직자 수를 전체 일자리 수로 나눈 ‘이직률’은 높아진 데 반해, 신규 채용과 배치전환 등 입직자 수를 전체 일자리 수로 나눈 ‘입직률’은 2015년을 정점으로 빠르게 낮아지는 중이다. 질 좋은 일자리가 ‘어딘가’로 증발했음을 알 수 있다. 과연 어디로?

 

리처드 볼드윈 스위스 제네바 국제개발연구원(IHEID) 교수가 최근 펴낸 <글로보틱스 격변>.
리처드 볼드윈 스위스 제네바 국제개발연구원(IHEID) 교수가 최근 펴낸 <글로보틱스 격변>.

 

혼돈의 밑바탕엔 일시적 ‘피난 심리’

시곗바늘을 잠시 되돌려보자. 19세기 중반 수백만명의 일자리를 위협한 건 무인 자율주행 자동차가 아니라 인간이 운전하는 첨단 ‘탈것’이었다. 마부들의 거센 저항을 누그러뜨리고자 영국에선 특이한 조례가 잠시 존재했다. 증기기관이나 동물 이외의 동력원으로 움직이는 차량의 경우, 최소한 3명을 반드시 고용해야 한다는 게 뼈대. 특히 이 중 한명에게는 차량보다 60야드(약 55m) 앞서 붉은 깃발을 들고 걸어가면서 경고 신호를 주는 역할을 맡겼다. 바로 1865년의 ‘붉은 깃발 조례’다. 이 조례대로라면 차량의 최고 제한속도는 시속 3.2㎞(!)였다. 기술과 혁신에 반대하는 움직임이 얼마나 덧없는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종종 거론된다.

과연 글로보틱스 격변에선 어떨까? 격변의 파고에 가장 크게 노출된 건 수억명에 이르는 선진국의 서비스 노동자다. 특히 고도의 전문성을 요구하지 않는 금융·아이티·물류 부문 등은 직격탄을 피하기 어렵다. 볼드윈이 블루칼라와 화이트칼라의 ‘뒤섞임’(fusion) 가능성을 조심스레 점치는 이유는 어렵지 않게 짐작된다. 제조업에서 서비스 부문으로 일자리의 무게중심이 옮겨가면서 블루칼라 일자리가 집중 타격을 받았다면, 이젠 화이트칼라 일자리마저 흔들리고 있어서다.

물리적 장벽조차 세울 수 없는 원격이민자와 인공지능의 거센 물결. “기술 발전을 거부하지는 않으나 일시적으로나마 도피하고 싶은” 일종의 ‘피난 심리’(그가 ‘shelterism’이라 표현한 현상의 알맹이다)가 퍼져가는 상황에선 출구를 찾지 못한, 방향을 잃은 ‘분노의 연대’만이 근육을 키우기 십상이다. 글로보틱스 격변은 이제 겨우 시작됐을 뿐이다. 

 

 

< 출처 : 한겨레산문 >

:
Posted by sukji

 

 

4차산업혁명 시대의 ‘세계화’가 갈 길은?

세계경제포럼은 매년 새로운 어젠다를 놓고 해법을 논의한다. 세계경제포럼 제공

 

세계화 시각으로 본 인류 역사 30만년

 
물건을 어느 위치에서 보느냐에 따라 모양이 달리 보이는 경우가 많다. 역사적 사실도 마찬가지다. 어떤 관점으로 보느냐에 따라 그 역사적 사실의 의미가 달라진다. 그래서 역사적 관점은 결국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이어진다.

18세기 독일 철학자 헤겔은 역사를 이성의 실현, 자유의 전개 과정으로, 20세기 영국 역사학자 토인비는 역사를 도전과 응전의 패러다임으로 보았다. 요즘 가장 주목받는 역사학자 가운데 하나인 유발 하라리는 호모 사피엔스의 지구 지배력 강화 과정으로 역사를 풀어낸다. 그에 따르면 인류는 언어가 촉발한 인지혁명(7만년 전)에서 시작해 농업혁명(1만2천년 전), 과학혁명(500년 전)을 거치며 지구의 지배력을 강화해 갔다. 이것 말고도 생산 방식이나 정치 체제, 기술의 변화 등 역사를 보는 관점들은 다양하다.

리처드 볼드윈(Richard Baldwin) 스위스 제네바 국제경제대학원 교수는 인류의 역사를 세계화의 과정으로 바라보는 경제학자다. 그는 2016년 <위대한 수렴>(The Great Convergence)에서 세계화를 생산과 소비가 일어나는 공간의 변화라는 시각으로 설명했다. 이에 따르면 구석기 수렵채집 시대까지만 해도 세계화는 없었다. 생산과 소비는 한 곳에서 일어났다. 최초의 세계화, 즉 세계화 1.0 시대를 촉발시킨 건 기후변화였다. 기원전 30만년~기원전 1만년에 이르는 시기다. 볼드윈은 이 시기를 `지구의 인간화'라고 이름 붙였다. 7만년 전 대규모 화산 폭발로 구름이 하늘을 뒤덮으면서 기온이 뚝 떨어져 지구 생태계에 위기가 닥쳤다. 저온 현상과 가뭄으로 먹을 것이 부족해지자 호모 사피엔스는 식량을 찾아 아프리카를 탈출했다. 한 무리는 북쪽 유럽으로, 다른 한 무리는 아시아로, 또 다른 한 무리는 더 남쪽으로 미지의 세상을 찾아 나섰다.

 

인류 역사를 세계화의 심화 과정으로 보는 사람들은 지금을 `세계화 4.0‘으로 규정한다. 픽사베이.
인류 역사를 세계화의 심화 과정으로 보는 사람들은 지금을 `세계화 4.0‘으로 규정한다. 픽사베이.

농업혁명에서 출발해 증기기관으로 가속

세계화 2.0(기원전 1만년~서기 1820년)은 지역 경제의 발흥기다. 신석기 시대를 연 농업혁명이 촉발했다. 농업 덕분에 사람들은 각자가 있는 곳에서 음식을 먹을 수 있게 됐다. 이때도 구석기시대와 마찬가지로 생산과 소비는 한 곳에서 이뤄졌다. 그러나 인류는 아프리카라는 한 지역에 고정돼 있지 않았다. 필요한 것들을 자연에서 수집하는 대신 흙과 나무, 풀 등을 이용해 의식주를 해결했다.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개발이 시작된 때다. 개발의 중심은 강 주변이었다.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더스, 황하 등지에선 거대한 강을 중심으로 고대 문명이 번성하기 시작했다. 볼드윈은 "이 시기에 인류 역사상 처음으로 생산과 소비가 특정 지역에서 한 묶음으로 이뤄졌다"고 설명한다.

세계화 3.0(1820~1990년)은 지역경제의 세계화 시기다. 증기기관이 첫 물꼬를 텄다. 증기기관은 먼 곳까지 쉽게, 그리고 싸게 물건을 운송할 수 있게 해줬다. 운송비용이 급락해 무역이 활발해지면서 생산과 소비 지역이 처음으로 분리되기 시작했다. 하지만 공장은 산업지구 같은 특정 지역에 몰려 있었다. 이는 특정 지역, 국가만이 부유해지는 결과를 낳았다. 세계는 잘 나가는 자본주의 그룹 1세계와, 이에 반대의 깃발을 든 공산주의 2세계, 이도 저도 아닌 저개발 3세계로 나뉘었다.

 

주요 7개국과 중국, 인도의 세계화 단계별 경제 비중. 볼드윈 교수 링크드인
주요 7개국과 중국, 인도의 세계화 단계별 경제 비중. 볼드윈 교수 링크드인

 

공장의 세계화에서 가상 세계화까지

세계화 4.0은 공장의 세계화다. 1990년 이후 지금에 이르기까지 현재 진행형이다. 우선 정보통신기술이 상품과 서비스의 운송, 거래 비용을 획기적으로 낮추고 공정의 표준화를 가능하게 해줬다. 생산과 소비의 분리를 넘어, 생산 과정의 분리가 시작됐다. 완제품 공장과 부품 공장이 한 나라에 있을 필요가 없게 됐다. 두번째 분리다. 선진국 기업들은 저임금 개발도상국에 공장을 두는 게 더 유리했다. 오프쇼어링(해외생산)이 유행처럼 번져갔다. 선진국 제조업 독점 시대가 끝났다. 브릭스(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같은 신흥경제가 급부상하게 됐다.

이제 모든 것이 디지털화하는 4차산업혁명이 시작되려 하고 있다. 앞으로는 노동과 노동 서비스의 분리가 가능해진다. 즉 사람의 몸과 노동이 분리된다. 세번째 분리다. 몸을 움직이지 않고도 전세계 어느 곳의 일도 처리할 수 있게 된다. 이름하여 `가상(버추얼) 세계화'다. 공장의 세계화와 구분하자면 오피스의 세계화라 불러도 좋을 것이다. 마지막 장벽이라 할 언어장벽도 인공지능의 기계번역 기술 발전과 함께 점차 허물어질 것이다. 볼드윈은 선진국과 개도국 간의 현격한 임금 격차가 `가상 세계화'를 가속화할 것이라고 내다본다. 그는 이를 원격이민(telemigration)이라고 이름 붙였다. 사실 웹 개발 분야에선 벌써 많이 퍼져 있는 방식이기도 하다. 여태까지 높은 숙련도와 전문성으로 버텨온 사람들도 이 물결의 영향권을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4차산업혁명에선 블루칼라에서 화이트칼라에 이르는 대부분의 노동자가 세계화 문턱에 서게 된다. 볼드윈은 24일에 출간하는 새 저서에서 이런 상황을 `글로보틱스 격변'(The Globotics Upheaval)으로 표현했다. 앞으로 진행될 세계화 4.0은 인류를 어디로 데려갈까?

 

세계경제포럼이 열리는 스위스 여름 휴양지 다보스. 세계경제포럼 제공
세계경제포럼이 열리는 스위스 여름 휴양지 다보스. 세계경제포럼 제공

 

세계경제포럼이 2019년 주제로 삼은 `세계화 4.0'

22일부터 나흘 동안 열리는 세계경제포럼(WEF)이 올해의 토론 주제를 `세계화 4.0 : 제4차 산업혁명 시대'로 정했다. 2년 전 이 포럼에서 논의한 4차산업혁명과 코드를 맞춘 작명이다. 하지만 4차산업혁명이 초래할 변화를 압축한 표현이기도 하다. 세계경제포럼은 전세계 거물급 기업인, 정치인, 관리, 학자들이 모여 세계 경제의 현안과 대안을 논의하는 모임이다. 해마다 연초에 스위스의 여름 휴양지 다보스에서 열린다 해서 다보스포럼이라고도 불린다. 참여자들이 다 거물 보스(boss)들이어서 `다 보스'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일부에선 부자들이 벌이는 `그들만의 잔치판'이라며 곱지 않은 눈길을 보낸다.

1971년 하버드대 교수 클라우스 슈밥(Klaus Schwab)이 창립한 유럽경영포럼에서 시작했지만 1987년부터 세계 현안을 논의하는 세계경제포럼으로 이름을 바꿨다. 이제는 굴지의 민간 국제포럼으로 발돋움했다. 더 나은 세계(2010), 유연한 역동성(2013), 세계의 재편(2014), 4차 산업혁명(2016)에 이어 지난해 `소통과 책임 리더십'에 이르기까지 해마다 포럼이 내세우는 주제들은 전세계 리더들을 향한 메시지를 담고 있다.

포럼의 슈밥 대표는 세계화 4.0을 들고나온 이유에 대해 "닥쳐올 변화는 엄청나지만 이를 맞을 준비가 거의 안 돼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새로운 세계화, 즉 세계화 4.0을 이끌어가는 흐름으로 네 가지를 꼽는다. 첫째는 세계 경제가 다자주의(multilateralism)에서 다원주의(plurilateralism)로 넘어가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생존의 룰이 경쟁이나 협력에서 공존으로 바뀌고 있다는 뜻이다. 둘째는 세계의 힘의 균형은 일극에서 다극으로 이동했다는 인식이다. 셋째는 기후변화를 포함한 생태적 도전이 사회경제 발전을 위협하는 수준에 이르렀다는 점이다. 넷째 4차산업혁명으로 기술이 사상 유례없는 속도와 규모로 인류의 삶에 파고들고 있다는 점이다.

 

인도네시아의 새우 경매장. 옥스팜 보고서
인도네시아의 새우 경매장. 옥스팜 보고서

 

세계화의 어두운 그림자 `약육강식'과 `불평등'

하지만 인류가 경험해온 세계화가 삶을 풍요롭고 편리하게 해준 것만은 아니다. 산업혁명 이후 오랜 기간 세계화는 세계적인 약육강식 사태를 불렀다. 자유방임주의, 제국주의, 독점자본 환경이 이를 조장했다. 세상은 강자들만의 무대였다. 아무도 감히 이들을 막지 못했다. 한쪽은 제국의 신민으로, 다른 한쪽은 식민지 노예로 엇갈렸다. 가진 자의 부는 눈덩이처럼 불어났고, 그렇지 못한 자는 비참한 신세가 됐다. 이는 결국 피를 불렀다. 세계대전, 대공황, 공산주의 혁명, 파시즘 반동이 이어졌다. 수억명이 목숨을 잃었다. 두 차례의 세계대전을 겪고 나서야 인류는 위기관리 시스템을 구축했다. 유엔, 아이엠에프, 세계은행 같은 것들이다.

세계화의 또 다른 얼굴은 불평등 심화다. 완전고용과 사회보장, 노동권 등은 선진국에만 해당하는 사항이었다. 부의 편중은 자산의 평형추를 `20 대 80'에서 `1 대 99'로 바꿔놓았다. 세계은행에 따르면 2017년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최상위 1%가 새로운 창출된 부의 82%를 가져갔다. 세계 전체의 빈곤율은 줄어들고 있지만, 사하라 이남 아프리카에선 오히려 늘어나고 있다. 2030년 빈곤 퇴치라는 유엔 목표는 사실상 물 건너갔다는 평가다. 국제구호단체 옥스팜은 최저임금을 벌기 위해 시간당 950마리의 새우 껍질을 벗겨야 하는 동아시아시아 노동자가 미국 슈퍼마켓 경영자의 1년치 수입을 벌려면 5천년 이상을 일해야 한다고 고발했다.

성장이 주춤해지면서 20세기 후반에 등장한 신자유주의 정책은 미국의 시스템을 전세계에 퍼뜨렸다. 1994년 무역 관련 지적재산권협정(TRIPS)은 그 사례다. 거대 제약사와 기술 기업들이 덕분에 엄청난 지대수입(불로소득)을 올렸다. 비대해진 선진국 금융자본은 세계 구석구석의 자산을 곶감 빼먹듯 했다. 명분은 시장개방과 금융 자유화였지만, 그 속은 자국에 유리한 무역과 투자 규칙을 강요하는 것이었다. 이는 결국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를 불렀다. 벼랑에 내몰린 이들에게 포퓰리즘 세력들은 화살을 내부의 기득권층이 아닌 외부로 돌리게 했다. 영국의 브렉시트 결정, 미국의 트럼프 당선 등은 포퓰리스트들의 증오 전략이 먹혀든 결과였다. 가이 스탠딩(Guy Standing) 런던대 소아즈(SOAS) 교수는 20세기 후반 신자유주의 시대 이후 약탈이 더 심해지면서, 프롤레타리아보다 더욱 불안정한 `프레카리아트'(precariat)라는 새로운 무산계층이 탄생했다고 말한다. 세계는 소수 글로벌 공룡과 나머지 수십억 파편들로 나뉘었다.

 

프랑스에서 벌어진 노란조끼 시위. 위키백과
프랑스에서 벌어진 노란조끼 시위. 위키백과

 

디지털 기술이 펼칠 세계화 4.0은 어떤 모습일까

불평등은 불만의 증폭제다. 방치된 불만은 결국 충돌을 부른다. 수많은 피의 역사가 이를 말해준다. 지난해 말 유류세 인상에 반발해 순식간에 반정부 시위로까지 번진 파리 서민들의 '노란 조끼'(gilet jaune) 운동은 아주 작은 사례다. 지난해 지구촌은 중산층과 인터넷 이용자 인구가 처음으로 전세계 인구의 절반을 넘어서는 분기점을 맞았다. 잠자던 의식을 일깨우는 중요한 기폭제가 등장한 셈이다. 빈곤을 넘어선 사람들은 앞으로 삶의 질을 따지기 시작할 것이다. 인터넷에 널린 정보들은 그들이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열악한지 깨닫게 해줄 것이다. 불평등 이슈가 빠르게 확산될 가능성이 커졌다. 산업의 역사가 오랜 선진국들은 또 다른 문제를 코앞에 두고 있다. 불평등의 대물림이다. 인구 감소와 자산 승계, 저성장이 어우러지면서 문제가 복잡해지고 있다.

포럼이 이 시점에서 세계화를 화두로 삼은 건 100년 전 파국이 재현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의 반영이다. 여기엔 세계로 확산된 불평등이 세계 경제의 위험 요인이 됐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4차산업혁명의 중심인 디지털 기술은 불평등을 한 차원 더 심화시킬 잠재력을 갖고 있다. 디지털은 그나마 남아 있던 지리적 장벽마저 쓸모없게 만들 것이다. 샤란 버로우(Sharan Burrow) 국제노동조합총연맹(IYUC) 사무총장은 전세계인의 85%가 세계 경제의 규칙을 다시 써야 한다고 생각한다는 설문조사 결과를 전했다. 4차산업혁명론자들이 지금 시점에서 `세계화 4.0'을 화두로 삼은 이유를 짐작할 만하다.

 

지난해 11월 두바이에서 열린 2019 세계경제포럼 사전 모임. 세계경제포럼 제공
지난해 11월 두바이에서 열린 2019 세계경제포럼 사전 모임. 세계경제포럼 제공

 

불평등 해소는 정의의 문제...올바른 혁신 규칙 고민을

어떤 해법을 생각해볼 수 있을까? 볼드윈 교수는 각국 정부를 향해 변화의 속도를 늦추라고 권한다. 사람들이 변화에 적응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정부의 할 일이며, 이를 위해선 시간을 벌어줘야 한다는 것이다. 스탠딩 교수는 정부가 할 일은 불안하고 고단한 삶에 노출된 프레카리아트를 구출해내는 것이며, 프레카리아트가 할 일은 정부에 기술진보의 과실을 좀 더 평등하게 나눌 수 있는 지속가능한 경제 시스템을 만들도록 압박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포럼 대표인 슈밥은 공동번영의 미래를 위한 세계화의 규칙을 다시 만들자고 제안한다. 그는 이를 위해 모든 이해관계자의 꾸준한 대화와 국가적 이해관계를 넘어선 상상력을 주문했다.

다양한 아이디어들을 관통하는 기본 가치는 물론 휴머니즘이다. 세계화 4.0 시대에 중심으로 떠오르는 가치는 뭘까? 지난 100년의 세계화 흐름은 평등 문제가 시급한 과제임을 말해준다. 불평등을 완화하고 해소하는 건 정의의 문제이기도 하다. 평생을 정의론 정립에 바쳐온 미국의 철학자 존 롤스는 최소 수혜자의 몫이 커지는 것이 바로 정의라고 했다. 이것이 충족되지 않으면 사회적 불평등은 정당화될 수 없다고 그는 강조한다. `세계화 4.0' 논의는 세계적인 불평등 확산의 흐름을 바꾸는 물꼬를 틀 수 있을까?

 

< 출처 : 한겨레신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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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sukj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