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5. 27. 10:30
코로나 이후 노동 달라져야 한다 교육.기타2020. 5. 27. 10:30
코로나 이후 노동 달라져야 한다
ㆍ재택·유연근무 확산에 따른 쟁점과 ‘상병수당’ 도입 등 새 질서 논의할 때
바이러스는 노동에 질문을 던졌다. 불합리한 근무체계, 부실한 사회안전망같이 노동현장에 산재한 문제들을 낱낱이 드러내며 기존의 규칙에 균열을 냈다. 수년간 지지부진했던 논의들이 급물살을 타고 있다. 코로나19의 역설이다.
일터는 그리 쉽게 바뀌지 않겠지만, 수십 년 후에 올 노동의 미래를 앞당겼다는 분석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코로나19 이전의 소소한 일상이 그리울지 몰라도 노동만큼은 과거에 머무르고 싶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 바이러스가 드러낸 노동 현실을 돌아보고 새 질서를 논의할 때다.
더 이상 재택근무가 낯설지 않다. 그간 정부는 ‘일·가정 양립을 통한 생산성 제고’라는 목적으로 시차출퇴근제·선택근무제·원격근무 등 유연근무제 정착을 위해 애썼지만 현장의 반응은 미지근했다. 오전 9시 출근, 오후 6시 퇴근하는 ‘사무실 근무’ 공식은 좀처럼 깨지지 않았다. 다급하니 상황이 변했다. 코로나19는 재택근무 가능성을 실험하는 계기가 됐다. 반드시 대면 업무가 필요한 업종이 아니라면 유연근무제를 도입할수 있다는 것을 현장이 깨닫고 있다.
‘회사 출근=업무’ 공식이 흔들린다
코로나19로 인한 재택근무는 대다수 기업에서 임시방편으로 추진됐다. 향후 재택근무를 상시 도입하려면 노사가 근로조건에 합의하거나 취업규칙 등을 통해 명확한 근무기준과 보상체계를 마련해야 할 필요가 있다. 재택근무의 보편화는 새로운 쟁점을 불러온다. 근태관리는 어떻게 할지, 노동시간은 어떻게 잴지, 적정 노동량은 얼마인지 ..
집에서 일해도 업무와 관련해 발생한 부상 또는 질병은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 고용노동부 가이드라인에 따르면 업무 중 의자에서 일어나다 골절상을 입었다면 업무상 재해로 인정된다. 하지만 샤워 중에 미끄러지거나 육아를 하다가 다친 경우같이 개인적 행위 때문이라면 산재로 인정받기 어렵다. 재택근무 중 라면을 끓이다 화상을 입는 경우같이 명확하지 않은 지점도 있다. 기존에는 작업장으로 출근한 노동자가 점심시간에 밥을 먹다가 다치면 산재가 인정됐다.
유연근무가 확산하면 성과 평가방식·임금체계의 변화도 따라붙게 될 전망이다. 오계택 한국노동연구원 임금직무혁신센터 소장은 “6시 출근, 9시 퇴근의 근무체계에선 출근하면 일하는 것이라고 인정해주지만 재택근무나 온라인 방식의 업무로 바뀌면 개인의 업무 범위를 명확하게 하고, 업무를 수행한 근거 역시 명확히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원격근무가 노동자들을 개별화시키고 협업을 느슨하게 만들 수 있다는 점, 중소기업이나 디지털 격차에 시달리는 지역 노동자들은 원격근무에서 배제될 수 있다는 점 등 근무방식 변화에 따른 다양한 차원의 논의가 필요하다. 기업체는 혼란을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라도 업무규칙과 소통방식을 재정비해야 한다.
“‘아파도 나온다’라는 문화를 ‘아프면 쉰다’로 바꿀 수 있도록 근무 형태나 여건 등을 개선해야 합니다.”
정은경 중앙방역대책본부장이 지난 3월 16일 브리핑에서 강조한 말이다. ‘물리적 거리 두기’가 한창일 때 서울 구로 콜센터의 한 확진자가 증상이 나타났는데도 2시간을 더 일하고 들어갔다는 소식이 알려진 뒤였다. 콜센터 집단감염은 바이러스와 일상의 노동을 연결짓게 했다. 4월 10일 구로 콜센터 확진자가 산재 인정을 받았다. 장기적으로 밀집된 작업장에 대한 환기 기준, 최소한의 개인 면적 등 법정요건을 만드는 것이 과제로 떠올랐다.
‘상병수당’ 도입 논의도 탄력을 받고 있다. 상병수당은 건강보험 가입자가 업무상 질병 외에 일반적인 질병·부상으로 치료를 받는 동안 잃게 되는 급여를 현금수당으로 보전하는 제도다. 국내에선 낯설지만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대다수가 실시한다. 현행 근로기준법에는 업무 이외의 부상·질병으로 인한 병가 규정이 없다. 개별 기업에서 사내 복지 차원으로 유급병가를 준다. 영세사업장에선 기대하기 힘들다. 최근 정부가 내놓은 생활방역 핵심수칙 중 하나인 ‘아프면 3~4일 쉬기’ 역시 권고 차원으로는 지키기 어렵다. 보건복지부는 상병수당 도입을 검토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아파도 나온다? 아프면 쉬자
최민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직업환경의학전문의)는 “사람이 아파서 쉬면 경제적 손실이 발생하는데 그걸 보상해주지 않으면 치료에 전념할 수 없다. 이들이 건강해져 다시 경제생활로 돌아오게 하는 것은 곧 사회에 도움이 되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구체적인 제도는 ‘아프면 쉬자’는 규칙이 자리잡는데 기본 바탕이 될 것이라 본다”고 덧붙였다. 최 활동가는 “콜센터 상담사처럼 감염에 취약하지만 우리가 잘 모르는 노동자들이 더 많을 것”이라며 “인간답게 일한다는 게 어떤 건지 기준을 찾고 그에 맞는 환경도 갖춰가야 한다”고 말했다.
고용위기에 생계를 위협받는 노동자를 위한 보장책은 크게 두 가지다. 하나는 실업을 방지하는 제도다. 고용을 유지할 것을 전제로 기업체를 지원하는 고용유지지원금이 대표적이다. 다른 하나는 실업급여와 같이 일자리를 잃은 사람들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다. 두 가지 모두 고용보험이라는 제도권 안에서 적용된다. 문제는 특수고용직이나 플랫폼 노동자, 프리랜서 등은 제도권 밖에 있다는 것이다. 사회안전망의 사각지대다. 전통적 고용관계를 가정한 법 규율과 보호체계에선 보호받을 수 없는 이들을 위해 다른 방식의 규율을 모색해야 한다.
이번 기회에 제도권 밖에 있던 취약계층을 제도권 내로 끌어들여 보편적인 고용보험 시스템을 도입하자는 목소리가 힘을 얻고 있다. 특수고용노동자와 예술인에게 고용보험을 적용하는 고용보험법 개정안이 2018년 11월 발의됐지만 계류 중이다. 박은정 인제대 교수는 “사업장 중심적인 사고, 고용상태의 전속성 중심적인 사고방식에서 벗어나서 모든 일하는 사람들을 위해 개인을 중심으로 사회보험제도가 방향을 잡아가야 한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1953년 제정 이래 크게 손본 적 없는 근로기준법을 재정비해야 한다는 목소리에도 힘이 실리고 있다. 공장 노동에 기반을 둔 근로기준법은 노동자 개념을 지휘·감독으로만 협소하게 판단한다. 플랫폼 노동자를 비롯한 ‘비임금 노동자’들은 근로기준법의 밖에 머문다. 김종진 한국노동사회연구소 선임연구위원은 “‘일하는 사람들을 위한 법’이 될 수 있도록 포괄성을 넓히는 방향으로 변화가 필요하다”며 “이 부분이 바뀌지 않으면 어떤 정책이든 지속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 출처 : 주간경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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