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미래’라는 말을 별로 신뢰하지 않는다. ‘미래교육’이라는 말 또한 그렇다. 미래라는 말이 결코 가치중립적이지 않다는 점에서다. 지금, 누가 미래를 말하고 이익을 보는가를 자세히 따져보지 않으면 공허한 미래주의에 현혹될 수 있다.
2016년 알파고 충격 이후 소위 4차 산업혁명 담론이 등장했지만, 결국 자본의 이익을 위한 공포 마케팅의 일종으로 활용되고 있다는 점을 직시할 필요가 있다.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 제4부에 묘사된 생명공학, 사이보그, 인공지능을 비롯한 트랜스휴머니즘(transhumanism) 류의 기술-미래 담론은 역사학이 생물학 또는 미래학으로 변형되어 현실을 압박하는 하나의 예가 될 것이다.
우리가 정작 물어야 할 질문은 ‘어떤 미래인가?’이다. 김환희의 『미래·공생교육』은 미래를 말하지만, 코로나19 이후 ‘공생(共生)’을 위한 미래교육에 방점을 더 찍고 있다.
그래서 책을 덮고 나면 ‘공생하는 인간’을 의미하는 ‘호모 심비우스(Homo Symbious)’라는 말이 떠오른다. 이 책은 코로나19 시대 학교 교육을 성찰하며 서로를 돌보는 돌봄의 주체가 되어 공생교육을 하는 ‘마을교육공동체’를 지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지금의 불신사회에서 공생사회로 진화하지 않으면 각자도생의 지옥도가 펼쳐질 것이라는 점에서다.
그렇다면 무엇을 위한 공생교육인가. 저자는 시간-공간-타자-생태, 네 가지 영역에서의 공생교육이 지금 필요하다고 역설한다. 세대 간 공생(시간), 지역성에 기반을 둔 구체적 이웃을 대상으로 한 공생(공간), 과대해진 자아(Big Me) 넘어서기와 사랑과 고통을 통해 모름을 인정하기(타자), 다른 생명-비생명 종과의 공생 및 인간중심주의 끝내기(생태)를 위한 공생교육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공생의 가치가 기생(寄生)으로 변질되어버린 교육 현실에서 ‘미래·공생교육’을 역설하는 저자의 주장이 의미 있는 것은 ‘코로나19’라는 재난의 현실 때문이다. 서로 불신하는 사회를 넘어 ‘생태적 전환’을 위한 공생교육을 준비하지 않으면 사회의 바탕이 무너지며 공멸할 수 있다는 저자의 생각에 나 또한 동의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지 못하는 게 아니라, 관계의 질을 넘지 못한다”는 말은 김환희가 지금의 교육 문제를 다루는 기본 태도가 아닐까 한다.
모두 3부 9장으로 구성된 책에서 특히 눈길을 끄는 대목은 ‘1부 불신사회’이다. 개인의 자기관리 능력을 강조하는 ‘역량’(competency) 개념에 대한 비판적 검토를 통해 아마티아 센과 마사 누스바움이 제안한 ‘역량’ (capability) 개념을 교육과정에 적극 도입해야 한다는 주장은 매우 설득력이 있다.
이뿐만이 아니다. 현직 교사이자 [오늘의 교육]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는 교육운동가로서 우리 안의 능력주의(Meritocracy)와 2016년 4·16 세월호 참사 이후 안전자본주의와 안보정치에 포위된 학교 현장을 신랄히 비판하는 김환희의 붓끝은 매섭다. 예를 들어 매뉴얼과 절차가 유독 강조되며, 유례없는 안전 강박증을 앓는 학교 현장의 모습은 어느 교사의 말에서 잘 알 수 있다. “나는 학교에서 학생들한테 라면 하나도 못 끓이게 해. 라면에도 기름이 들어 있잖아.”(61쪽)
2부에서는 인지 자본주의, 노동의 미래, 디지털 리터러시에 관해 서술하고 있다. 김환희는 ‘유토피아적 디스토피아’의 관점에서 노동의 미래를 진단하는가 하면, 최근의 코딩 교육 열풍은 새로운 산업의 필요에 의해 요구되는 것이라고 잘라 말한다.
그렇다고 기술 변화에 대해 19세기 러다이트(Luddite, 기계 파괴) 식의 태도를 보여주는 것은 아니다. 6장에서 해커스페이스(Hackerspace)와 핵듀케이션(Hackducation)을 학교 현장에 도입해 디지털 리터러시를 강화하는 공생교육을 해야 한다고 강조한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흥미로운 지점은, 최근 학교 현장에 도입된 메이커교육 열풍에 대해, 대중을 ‘소비자 주체화’하는 또 하나의 잠재적 교육과정이 아닌지 의심하는 대목이다. 나 또한 ‘생각하는 손’(리처드 세넷)의 철학을 잃어버린 메이커 교육에 대해 그런 혐의를 갖고 있기 때문이다.
김환희가 생각하는 미래교육은 ‘언러닝’(Un-learning)과 ‘역설계’(RE:design) 그리고 교육농(農) 같은 가치를 통해 ‘자립의 주체’로 만들기 위한 핵듀케이션에 있다. 핵듀케이션은 자신의 아이디어를 실행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무엇인가를 만들고 변형하며, 이를 위해 다른 사람과 자원과 정보를 공유하며 협력하는 활동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학교 안과 밖에서 이루어지는 어린이·청소년 대상의 문화예술교육과 접목되는 것이 아닐까.
3부에서는 2부에서 제안한 미래교육이 학교 안과 밖 ‘마을교육공동체’에서 가능할 것임을 다양한 예시를 통해 보여준다.
김환희가 말하는 마을교육공동체의 의미는 한나 아렌트가 역설한 바 있는 작업(work)-노동(labor)-행위(action)의 연결망이 선순환하는 마을학습공동체로서의 의미를 지니는 것 같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지나치게 학교 중심의 거버넌스에서 벗어나 탈학교 거버넌스 또는 상호융합적 관계가 요청된다. 그렇지 않으면 교육과 사회는 더욱더 분리될 것이다. 견고한 관료주의를 넘어서는 교육행정혁신 또한 강력히 요구된다.
저자의 이러한 주장은 최근 코로나19 이후 부상한 마을(문화예술)학교 담론을 비롯해 ‘돌봄전환사회’ 논의와도 이어진다고 볼 수 있다. 나는 특히 먼 미래가 아니라 지금 당장 마을교육공동체를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에서 인류학자 데이비드 그레이버가 역설한 ‘예시적 정치’의 한 모습을 보게 된다.
자기와 타자를 배려하는 인간
문제는 누구나 예측하듯이 교육행정의 혁신이 쉽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교육부가 2020년 10월 5일 <코로나19 이후 미래교육 전환을 위한 10대 정책과제(안)>를 발표했지만, 공허한 미래주의 담론에 포획되었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10번 항목으로 ‘협력적 교육 거버넌스 구축’을 제시했지만, 실제 학교 현장은 그렇게 작동하지 않는다. 나 역시 “자원은 행정에서 지원하되, 그 결과는 교사, 학생, 주민 주도적인 성과를 내는 접근이 필요하다”(151쪽)는 저자의 주장에 전적으로 공감하지만, 현실의 교육행정은 ‘하던 대로’의 덫에 빠져 특정한 경로의존성을 보여주는 경우를 자주 목격하게 된다.
저자가 언급한 핀란드의 ‘참여실험실’, 영국과 호주 등의 ‘사회성과연계채권’처럼 정부 혼자 해결하기 어려운 복잡한 사회문제를 민간 주체와 함께 해결하려는 ‘공동생산’(co-product) 패러다임(156쪽)의 탑재가 교육행정에서 절대적으로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결론적으로, 『미래·공생교육』은 9장 제목처럼 ‘우리는 어떻게 서로를 돌볼 수 있을까’를 진단하고 처방하려는 책이다. 학교 현장의 문제를 진단하고 성찰하는 김환희의 붓끝은 예리하며, 학교 안과 밖을 연결하며 마을교육공동체를 제안하려는 문제의식은 최근의 돌봄 찬(carefull) 전환사회의 문제의식과 깊이 잇닿아 있다.
돌봄이라는 개념을 일방향적 서비스가 아니라 모두가 기본적으로 갖추어야 할 역능(力能)으로 파악한다는 점에서 그러하다. 이 점은 결국 코로나19 이후 교육을 생각할 때 ‘어떤 인간’을 기르는 교육이어야 하는가를 깊이 생각하게 한다. 그리고 이와 같은 문제의식은 학교 안팎에서 이루어지는 문화예술교육에도 해당할 것이다.
우리는 교사의 질은 ‘관계의 질’에 있다는 점을 생각하며, ‘하던 대로’의 관행에서 과감히 전환해야 한다.
책을 덮고 나니 ‘자기 배려’와 ‘타자 배려’라는 단어가 강하게 남는다. 나는 나를 어떻게 대하고, 나는 타자를 어떻게 대하는가. 푸코가 개념화한 ‘자기 배려’에서 중요한 것은 위험을 감수하며 진실을 말하는 용기를 의미하는 ‘파르헤지아’(parresia)이다.
『미래·공생교육』은 코로나 이후 미래교육이 공생교육이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는 일종의 파르헤지아로 읽혀야 한다. 아쉬운 대목은 덴마크, 스웨덴, 핀란드 교육 현장을 탐방한 ‘부록’이다. 우리는 이미 답을 알고 있다. 다시 말해 우리가 우리 문제를 잘 몰라서 교육 현장과 행정이 바뀌지 않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코로나19 시대 공허한 미래주의에 현혹되지 않기 위해 ‘누구를 위한 미래인가?’를 생각하자. 나는 차라리 “미래에 대한 최선의 예언자는 과거”라고 한 시인 바이런의 말을 더 신뢰한다.
『미래·공생교육』은 그러므로 ‘질문의 책’으로 읽혀야 한다. ‘전 국민 학습연구년제’를 비롯해 생태적 전환을 촉구하는 김환희의 질문 앞에서 나는, 우리는, 자신에게 질문하고 더불어 실천해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질문은 끝내 남는다. “돌봄과 생태라는 언어는 경제성장이라는 명령어를 대신할 수 있을까.”(17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