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진행이 곧 역사의 진보로 이어진다는 순진한 믿음을 버린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날이 갈수록 세상은 더 나빠지고 살기는 더 팍팍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지난해가 제시한 숙제를 미처 마치기도 전에 올해는 또 새로운 숙제를 우리 앞에 들이민 듯한 느낌입니다. 그렇게 풀지는 못하고 쌓이기만 하는 숙제를 어떻게든 풀어 보고자 우리는 책을 읽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책 속에 정답이 모두 들어 있지는 않다고 해도 문제를 풀기 위한 실마리는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한겨레’ 책지성팀이 1년 동안 읽고 소개한 책들 가운데에서 스무 권을 ‘올해의 책’으로 골라 보았습니다. 국내 저자의 책 10권과 번역서 10권으로 나누었고, 특정 분야나 출판사에 쏠리지 않도록 안배도 했습니다. 책을 고르면서 새삼 책을 쓰고 만들고 읽어 준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사코 나빠지려고만 하는 세상에 그나마 제동을 걸어 주는 게 곧 여러분들이라고 믿습니다. 한겨레 책지성팀
존엄 박탈당한 엄마를 되살리다
전쟁 같은 맛 / 그레이스 M 조 저, 주해연 역 / 글항아리 / 824.92 C545tKㅈ 인문실(3층)
백인 미국인 부친과 한국 기지촌에서 일하던 한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난 미국의 한인 2세 사회학자·인류학자 그레이스 조가 여성, 성노동자, 이민자, 조현병 등으로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차별과 고통 속에 살았던 어머니의 삶을 회고한 책이다. ‘양공주’란 이유로, 소수 인종이란 이유로, 어머니는 한국과 미국 양쪽에서 성차별적이고 제국주의적인 권력에 의해 인간으로서의 존엄을 박탈당했다. 지은이는 “결코 살아남을 운명이 아니”었던 어머니의 ‘사회적’ 죽음을 파헤칠 뿐 아니라, 죽음을 앞둔 어머니에게 그가 먹고 싶어했던 음식들을 요리해주며 회복, 치유, 위로 같은 가능성을 찾아낸다.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소도미법’ 폐지 이끈 그 책
생물학적 풍요 : 성적 다양성과 섹슈얼리티의 과학 / 브루스 배게밀 저, 이성민 역 / 히포크라테스
/ 591.562 B144bKㅇ 자연실(4층)
캐나다 출신의 생물학자이자 언어학자인 브루스 배게밀이 쓴 동물 섹슈얼리티에 대한 최초의 백과사전. 135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의 이 책은 1999년에 출간됐지만 이제야 국내에 소개됐다. 이 책은 미국 동성 간 성행위를 처벌하는 내용을 담았던 ‘소도미법’ 폐지 판결(2003년)과 인도 대법원의 동성애 비범죄화 판결(2018)에도 인용될 정도로 논거가 탄탄하다. 저자는 과학자들이 지난 200년 동안 동물 동성애를 연구하면서 얼마나 많은 선입견을 보여줬는지 분석하면서, 190여 종의 포유류 및 조류, 파충류, 양서류, 어류, 곤충 등 동물 동성애를 사실에 기초해 다룬다.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경계를 넘는 예술 여행
눈이 보이지 않는 친구와 예술을 보러 가다 / 가와우치 아리오 저, 김영현 역 / 다다서재
701.18 천212ㅁKㄱ 자연실(4층)
눈이 보이지 않는 시각장애인이 매년 수십 번씩 미술관에 가서 작품을 감상하고, 산책을 하며 찍은 사진들을 전시하고, 자신의 일상생활을 작품으로 내건다. 반사적으로 ‘그게 가능해?’ 묻는 사람들에게, 일본의 논픽션 작가가 ‘전맹(全盲) 미술 감상자’인 시라토리 겐지(54)와 함께 미술관 탐방을 했던 경험을 담은 이 책을 꼭 보길 권한다. 눈이 보이든 보이지 않든 우리의 존재와 감각은 저마다 다른데, 거기에 어떤 높낮이가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책은 있어야 할 것은 위계와 차별이 아니라 오직 대화를 나누고 서로의 여정을 공유하는 것일 뿐이라고 말해준다. ‘함께하기’의 따뜻함도 깊은 울림을 준다.최원형 기자
광활한 아리스토텔레스 세계로 낸 문
아리스토텔레스 선집 / 아리스토텔레스 지음, 조대호 외 역 / 길 / 구입 중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분야는 넓고도 넓어서 인간과 자연과 우주를 포함해 거의 모든 주제를 망라한다. ‘아리스토텔레스 선집’은 현전하는 아리스토텔레스 저작집 가운데 주요한 부분을 발췌해 번역한 책이다. 조대호 연세대 철학과 교수를 비롯해 아리스토텔레스 전문가 다섯 사람이 번역 작업에 참여했다. 발췌 번역이라고는 해도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을 둘러싼 핵심 논점이 된 대목들이 거의 빠짐없이 들어가 있어 이 선집만으로도 아리스토텔레스 사상의 광활한 세계를 조망할 수 있다. 형이상학자 아리스토텔레스뿐만 아니라 논리학자‧자연철학자‧실천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두루 만날 기회를 준다.고명섭 선임기자 michael@hani.co.kr
착취자들의 그린 뉴딜은 가라
민중을 위한 그린 뉴딜 : 제3세계 생태사회주의 / 론맥스 아일 저, 추선영 역 / 두번째테제
363.700973 A312pKㅊ 인문실(3층)
잘사는 나라들에서 기후위기 해결을 위해 제시하고 있는 ‘그린 뉴딜’들은 과연 전 인류와 지구를 위한 것일까? 세계체제 중심부-주변부 사이 착취 구도를 직시하는 ‘종속이론’을 자원으로 삼아, 튀니지 출신 농업사회학자 맥스 아일은 북반구 중심의 그린 뉴딜들이 기후위기에 대한 책임을 ‘전 인류’로 돌리고 전환의 부담을 되레 가난한 사람들에게 부과하려 한다고 까발린다. 지은이는 자본주의-제국주의적 착취에 대한 배상(기후 부채 상환)과 민중이 스스로를 다스릴 수 있는 정치·경제적 틀(국가/민족)을 중심에 놓는 ‘민중을 위한 그린 뉴딜’을 주창한다. 또 대전환은 농업을 중심으로 이뤄져야 한다고 역설한다.최원형 기자
“고급 창녀가 되고 싶다”
헌치백 / 이치카와 사오 저, 양윤옥 역 / 허블 / 813.32 시813ㅎKㅇ (인문실3층)
견고한 현실은 문학으로 붕괴된다. 그간 부재했던 주제, 부재했던 작가 범주를 일거에 무너뜨린 일본 소설. 지난 7월 아쿠타가와상 수상과 함께 현지 출판계가 들썩였다. “다시 태어난다면 고급 창부가 되고 싶다”거나 “임신과 중절을 해보고 싶다”는 장애 여성 주인공 샤카의 위악적 소망을 소설은 형상화한다. 스스로 ‘꼽추 괴물’로 부르는 샤카는 14살 때부터 인공호흡기를 달고 산 작가 이치카와 사오(44) 자신과 다르지 않다. 연애, 판타지 소설 등을 써온 이치카와가 작정하고 아쿠타가와상을 노려 쓴 정통 소설이다. 생명 윤리에 도전하는 작가는 한국 독자에게 그저 “삐딱한 주인공에 부디 큭큭큭 웃어주시길 바란다”고 썼을 뿐이다.임인택 기자 imit@hani.co.kr
동서 만남 아우른 세계철학사
세계철학사 / 이토 구니타게 외 편집, 이신철 역 / 도서출판b / 신청 중
‘세계철학사’(전 9권)는 일본의 철학 연구자들이 공동으로 집필한 대작이다. 동양철학과 서양철학 전공자 115명이 대거 합류해 해당 영역의 집필을 맡았다. 집필진은 이 저작을 일본에 서양 철학이 들어온 지 150여년 만에 처음으로 감행한 본격적인 ‘세계철학사’ 구축 시도라고 자평한다. 일본 철학계가 축적한 역량을 가늠해볼 수 있는 작업이다. 기원전 6세기부터 21세기까지 인류가 창출한 철학적 사유를 망라했다. 철학의 흐름을 문화권마다 살펴 나열하던 서술 방식에서 벗어나, 공동의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삼아 각각의 사유를 횡으로 비교함으로써 동시대 철학적 사유의 공통성과 독자성이 드러나도록 했다.고명섭 선임기자
유전학의 일대 변혁, 후성유전학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 / 데이비드 무어 저음, 정지인 역 / 아몬드
/ 572.86 M821dKㅈ 자연실(4층)
20세기 말까지 유전에 관한 학설에서 주류를 이룬 것은 유전자(DNA)가 단독으로 생명체의 형질을 결정한다는 유전자 결정론이었다. 이 유전자 결정론에 반기를 들고나온 것이 후성유전학이다. 미국의 신경과학자 데이비드 무어가 쓴 ‘경험은 어떻게 유전자에 새겨지는가’는 지난 20년 사이 놀라운 속도로 발전한 후성유전학을 소개하는 책이다. 최근의 후성유전학 연구는 유전자 결정론이 틀렸으며 라마르크의 ‘획득형질 유전설’이 설득력이 있음을 보여준다. 후성유전학 발견은 인간의 후천적 경험이 당대에 사라지지 않고 어떤 방식으로든 후대에 전달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유전학에 일대 변혁이 일어나고 있다. 고명섭 선임기자
‘지도 밖 팔레스타인’의 심연
사소한 일 / 아다니아 쉬블리 저, 전승희 역 / 강 / 892.736 S555mKㅈ 인문실(3층)
징후로서의 문학을 증명한다. “염소도 다른 염소가 도살장으로 끌려가는 것을 아는데, 인간은 왜 그러질 못하지요?” 팔레스타인 작가 아다니아 쉬블리(49)의 말이다. 이 소설에 10여년 품을 들인 배경. 건국 선언(1948) 이듬해 이스라엘의 군이 국경지대에서 한 아랍 소녀를 강간 사살한 과거와 이 사건의 실체를 좇는 21세기 팔레스타인 여성의 현재가 중첩한다. 세밀한 심리적 소요에 대한 핀셋 번역. 소설은 결국 올해 터진 하마스-이스라엘 전쟁과 중첩되고 만다. “지도에서 팔레스타인을 지우는 일은 오늘도 계속” 된다던 쉬블리는 이 작품으로 독일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서 ‘리베라투르’ 상을 받을 예정이었으나 시상식은 취소됐다.임인택 기자
한반도 전역을 폐허로 만들고 한반도 민중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안긴 한국전쟁은 언제 어디에서 기원했는가? 브루스 커밍스가 쓴 ‘한국전쟁의 기원’은 이 문제에 관한 가장 심층적이고 발본적이며 선도적인 저작으로 꼽힌다. 국내외를 통틀어 가장 탁월한 한국전쟁 연구서로 평가받는 기념비적 저작이다. 완간 후 32년 만에 완역된 한국어판은 전체 3권에 모두 2000쪽에 이르는 방대한 분량이다. 커밍스는 한국어판 서문에서 “1945년 이후 이 유서 깊은 나라를 경솔하고 분별없이 분단시킨 미국”의 잘못을 추궁하면서 “한국을 분단시킨 것이 내 조국이었기 때문에 나는 늘 책임감을 느꼈다”고 고백한다.
시간의 진행이 곧 역사의 진보로 이어진다는 순진한 믿음을 버린 지는 오래되었습니다. 그럼에도 날이 갈수록 세상은 더 나빠지고 살기는 더 팍팍해지는 것은 무엇 때문일까요. 지난해가 제시한 숙제를 미처 마치기도 전에 올해는 또 새로운 숙제를 우리 앞에 들이민 듯한 느낌입니다. 그렇게 풀지는 못하고 쌓이기만 하는 숙제를 어떻게든 풀어 보고자 우리는 책을 읽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책 속에 정답이 모두 들어 있지는 않다고 해도 문제를 풀기 위한 실마리는 찾을 수 있을 테니까요. 그렇게 ‘한겨레’ 책지성팀이 1년 동안 읽고 소개한 책들 가운데에서 스무 권을 ‘올해의 책’으로 골라 보았습니다. 국내 저자의 책 10권과 번역서 10권으로 나누었고, 특정 분야나 출판사에 쏠리지 않도록 안배도 했습니다. 책을 고르면서 새삼 책을 쓰고 만들고 읽어 준 분들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사코 나빠지려고만 하는 세상에 그나마 제동을 걸어 주는 게 곧 여러분들이라고 믿습니다. 한겨레 책지성팀
전사들의 노래 : 서지 않는 열차를 멈춰 세우며 / 홍은전 / 오월의봄 362.4 홍68ㅈ 사회실(3층)
인권기록활동가 홍은전 작가가 박길연·박김영희·박명애·이규식·박경석·노금호 장애인권활동가 6명의 생애를 총천연색으로 복원한 책이다. 뉴스 속에서 투쟁하는 모습으로만 알고 있을 활동가들의 삶의 굽이굽이를 탐색해 그들을 온전하게 담아냈다. 이동권 투쟁부터 장애등급제 폐지 운동까지 한국 장애인권운동사로 불려도 손색이 없지만, 책은 더 나아간다. 고통과 슬픔에 발목 잡힌 한 인간이 삶을 직면하고 한 발자국 더 내딛는 지점을 세밀하게 포착해 보여주면서, 그들이 어떻게 “스스로 지도가 되는지” 이야기한다. 한 인간의 삶에 대한 보편성과 특수성을 아름답게 교직한, 그야말로 ‘좋은 이야기’다.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과거사 정리는 끝나지 않았다”
베를린이 역사를 기억하는 법 1, 2 / 장남주 / 푸른역사 / 943.086 장211ㅂ 사회실(3층)
독일에 거주하는 프리랜서 작가 장남주가 두 권짜리 두툼한 책을 글과 사진으로 채웠다. 통일 과정을 다룬 2권도 흥미롭지만, 독일의 유대인 박해에 집중한 1권이 특히 인상적이다. 1985년 바이츠제커 대통령이 나치 항복 40주년 기념 의회 연설에서 이날을 항복이나 패전이 아닌 해방의 날이자 기억의 날이라고 선언한 것이 큰 계기가 되었다. 자국 역사의 치부를 까발리고 줄기차게 사죄하고 반성하는 데 대한 반발과 저항이 독일에서라고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과거사) 정리는 끝나지 않았다”는 연방 문화부 장관의 말은 과거사를 대하는 독일 정부와 시민 사회의 태도를 단적으로 알려준다. 최재봉 선임기자 bong@hani.co.kr
작품·자료로 떠난 흥미진진 문학기행
한국 근대 문학 기행 1~4 / 김남일 지음 / 학고재 / 구입 중
소설가 김남일이 쓴 ‘한국 근대 문학 기행’은 작품 무대를 발로 밟는 방식이라기보다는 작품과 자료, 사진을 통한 간접 기행에 해당한다. 휴전선에 가로막힌 평안도와 함경도가 포함되어 있기에 그것은 불가피한 선택이기도 하다. 현장을 직접 가지 못하는 대신 작품과 자료에 대한 천착은 한층 밀도가 높아졌다. 조선 망국기에서 해방까지를 배경 삼은 작품들을 샅샅이 훑고 작가와 작품 및 그 무대를 충실히 안내하는 지은이의 공력과 열정에 감탄이 절로 인다. 북녘을 무대로 한 작품들과 그곳 풍광을 담은 사진, 작품 속에 구사된 북방 말투를 접하다 보면 갈 수 없는 땅을 향한 그리움이 새삼 사무친다.최재봉 선임기자‘
불하받은 권력’ 만든 해방 공간
1945년 해방 직후사 : 현대 한국의 원형 / 정병준 / 돌베개 / 정리 중
1945년 8월15일 일본의 항복 선언이 곧바로 식민지 한국의 해방과 독립으로 이어진 것은 아니었다. 역사학자 정병준은 1945년 해방 공간에서 어떤 힘들이 어떻게 교차하며 ‘현대 한국의 원형’이 만들어졌는지 보여준다. ‘해방 공간’을 창출해 한국인들의 자생적 권력으로 등장했던 ‘건국준비위원회’는 일제·한민당·미군정 등으로부터 집요하게 공격받고 실책을 저지르며 힘을 잃어갔고, 미군정은 ‘문고리 권력’에 휘둘려 냉전 시작 이전부터 ‘반탁운동’을 벌이는 등 한반도를 대결 구도로 몰아갔다. 그 결과 해방 공간의 열망은 무력화됐고, 이 땅을 장악한 것은 미군정으로부터 ‘불하받은 권력’이었다.최원형 기자 circle@hani.co.kr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 : 한국 사회 성정치학의 쟁점들 / 정희진 / 교양인 / 305.42 정98ㄷ 사회실(3층)
2005년 ‘페미니즘의 도전’이라는 책을 통해 남성 언어로 길들여진 한국 사회에 균열을 내며 여성주의적 패러다임의 전환을 주도적으로 이끌었던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이 18년 만에 ‘다시 페미니즘의 도전’이라는 책으로 페미니즘의 최전선에 섰다. 작가는 ‘지금 여기’ 한국 여성들이 놓인 구조적인 모순을 천착하고, 그 구조 안에서 다양한 대응을 해가는 여성들의 행위에 주목하면서 여성주의 담론을 비판적으로 새롭게 재구성한다. 여성주의자들이 성소수자나 난민에 대해 적대적인 것을 어떻게 바라볼지, ‘피해자 중심주의’가 왜 여성에게 불리한지 등 첨예한 현안을 두루 다룬다. 양선아 기자
한자, 창조·변형의 복합적 산물
한자의 풍경 : 문자의 탄생과 변주에 담긴 예술과 상상력 / 이승훈 / 사계절 / 412.9 이58ㅎ 인문실(3층)
황제의 사관이었던 창힐이 새와 짐승의 발자국 모양에서 영감을 얻어 한자를 창제했다는 설은 2세기 초에 나온 최초의 한자 사전 ‘설문해자’에서부터 제기되어 왔다. 그렇지만 한자는 어느 개인의 발명이라기보다는 집단적 창작이라 보는 것이 정설이다. 이승훈 서울시립대 중국어문화학과 교수는 ‘한자의 풍경’에서 “한자의 발전은 단방향의 직선적 계승이 아니라 어떠한 형태가 창조되고 변형되고 또 일부는 도태되는 복잡한 과정의 산물”이라고 설명한다. 한자가 추상화·복잡화하면서 그 문자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내면과 외적 삶 역시 변화하는 과정, 흥미로운 한자 어휘들의 유래 이야기 등을 만날 수 있다. 최재봉 선임기자
이해할수록 더 경이로운 자연의 신비
인간은 왜 인간이고 초파리는 왜 초파리인가 : 운명을 가르는 생명의 레시피 / 이대한 / 바다출판사
576.5 이222ㅇ 자연실(4층)
진화유전학의 ‘젊은 기수’ 이대한 성균관대 교수가 첫 단독 저작을 통해 우리를 진화유전학 연구의 최전선으로 안내한다. 인간은 감각할 수 있는 생물학적 세계(‘표현형’) 너머 보이지 않는 곳에서 작동하는 생명 프로그램의 세계(‘유전자형’)를 직접 탐사하는 데에 이르렀다. 지은이는 생명이 마치 스리디(3D) 프린터처럼 똑같은 재료(유전자)를 가지고도 다양한 레시피(유전체)에 따라 엄청나게 다양한 요리(표현형)를 만들어낸다는 데 주목한다. 질병과 지능을 빚는 유전자가 따로 있는지, 표현이 아닌 행동도 유전하는지, 진화란 궁극적으로 우연인지 필연인지 등 진화유전학의 최전선에서 맞닥뜨린 질문들도 해설한다. 최원형 기자
하위주체에 주목한 고전문학사
한국고전문학사 강의 1~3 / 박희병 / 돌베개 / 811.09 박98ㅎ 인문실(3층)
고전문학자 박희병 교수가 정년을 앞두고 있던 2021년 봄학기 서울대 강의를 책으로 묶었다. 단군신화에서부터 19세기 말까지 고전문학의 흐름을 32개 강의에 담았고, 수강생들과 주고받은 질의응답을 매 강의 말미에 덧붙였다. 지은이는 문학사 속 인간을 크게 세 가지 지평 속에서 파악하고자 하는데, 사회·역사적 지평, 집단적 지평, 젠더적 지평이 그것이다. 그는 특히 여성과 서얼, 중인 같은 “하위 주체”들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고 강조한다. 우리 고유의 풍속인 토풍과 중화의 영향을 뜻하는 화풍의 길항과 습합을 통해 한국고전문학사에서 주체성의 문제를 중요하게 다룬 것 역시 큰 특징이다. 최재봉 선임기자
지적으로 음란한, 이 낯선 소설
말하지 않는 책 / 김솔 / 문학동네 / 811.32 김55ㅁ 인문실(3층)
올해 가장 낯선 소설들의 작가를 꼽으라면 김솔이겠다. (그로선 여일함인가) ‘낯섦’은 삶의 이면, 즉 진실을 드러내는 방식이자 그 진실이 드러나는 형식이다. 반기는 곳 없는 자본주의 세계를 ‘혈류의 속도’보다 느리게 그러나 끝없이 걷는 자(앤솔러지 ‘전두엽 브레이커’ 수록 단편 ‘걷는 여자, 걷는 남자’)를 통해 생존의 본질을, 문맹임에도 직접 쓴 시와 노래 가사로 구원을 증명하는 자(소설집 표제작 ‘말하지 않는 책’)를 통해선 책과 문자의 본질을 사유시킨다. 대부분의 종족 언어가 소멸한 시대(‘퍼플 케이크’)를 상상해보는 건 어떨까. 우화이길, 쉽게 읽히길 거부하는, 지적으로 음란한 이 소설들은 더 호명되어야 한다.
즐겁기 위해 떠난 여행이지만, 이 여정이 항상 즐거운 것만은 아니다. 그중에서도 안정적인 일상을 그만두고 떠나기를 택한 사람에게 여행은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이어지는 하나의 도전일 것이다. 낯선 곳에 발을 딛는 순간부터, 어려운 점은 셀 수 없이 많다.
하지만 얻는 것도 많다. 특히 여정 중 많은 사람과 교류하며 듣는 인생사는 여행을 떠나지 않았더라면 평생 알지 못했을 가치 중 하나다.
이에 홀로 떠난 여정에서 더욱 성장할 수 있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담은 책 3권을 소개한다. 한해의 끝을 앞두고 새로운 시작을 계획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책을 읽고 할 수 있다는 용기를 얻어 보면 어떨까.
학교 넘어 도망친 21살 대학생 : 울면서 떠난 세계여행, 2년의 방황 끝에 꿈을 찾다 / 홍시은 / 정리 중
‘학교 넘어 도망친 21살 대학생’ 표지 / 사진=도서출판 푸른향기 제공
꿈도 취미도 없이 강의실 뒷자리만 전전하던 21살 대학생이 있었다. 장래희망에 적을 것이 없어 선생님이 골라준 꿈으로 진학한 대학이었다. 당연히 학업에 대한 열정도 의지도 있을 리 없었다.
일상이 재미없고 스스로 쓸모없는 존재인 것만 같던 어느 날, 시험에 백지를 내고 학교에서 도망쳤다. 그리고 2년간 전 세계 오지를 떠돌았다. 그렇게 중동, 아프리카, 유럽 아시아를 여행하며 보고 느낀 것을 담은 책이 바로 ‘학교 넘어 도망친 21살 대학생’이다.
홍시은 작가의 여행 모습 / 사진=홍시은 작가 제공
작가는 이집트 다합에서는 다이빙 전문가에 도전하고 인도에서는 카메라를 배워 현지인에게 가족사진을 선물 하는 등 길에서 만난 모든 사람의 삶에 녹아들며 다채로운 세상을 배웠다. 특히 우간다에서 만난 고아원 교사 리디야는 작가에게 누군가의 삶을 더 나은 것으로 만들고 싶은 꿈이 있다고 전했다.
이 꿈은 전염성이 강해 작가를 이타적 삶으로 이끌었다. 세계 곳곳을 여행하며 다양한 사람을 만나고 이야기 한 작가가 결국 자신만의 꿈을 찾아 돌아왔기 때문이다.
홍시은 작가의 여행 모습 / 사진=홍시은 작가 제공
“인생이란 자신의 모양을 더듬어가는 과정이다. 그 과정 속에는 꿈이 있다. 여행이 있다. 그리고 방황도 있다. 뒤를 돌아보니 시작점이 보이지 않는 길이 이어지고 있었다. 그 길 위에는 바다가 있었다. 사막이 있었다. 그리고 낡은 일기장이 있었다. 나는 이제야 내가 발을 딛고 서 있는 이곳, 나의 길 위를 바라보기 시작했다.” _ 책 속으로
홍시은 작가의 여행 모습 / 사진=홍시은 작가 제공
책의 1장에선 작가의 꿈 없이 방황하던 대학 생활을 설명하고 2,3장에선 세계 여행 중 만난 사람의 꿈을 이야기 한다. 4장에서는 마침내 좋아하는 일을 찾아 작가만의 색깔과 꿈을 발견하는 과정을 담았으며, 마지막 5장에선 방황의 시간을 견디고 있는 학생을 위한 위로를 전한다.
이에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서성이는 청춘에게 ‘학교 넘어 도망친 21살 대학생’은 어디든 나아갈 수 있다는 용기를 주는 책이 될 것이다.
유럽으로 떠난 스물하나 / 고승민 / 좋은땅 / 구입 중
‘유럽으로 떠난 스물하나’ 표지 / 사진=좋은땅 제공
인생이란 순탄하게만 흐르지 않는다. 특히 그간 예상하고 준비했던 방향 대신 갑작스레 다른 길을 걸어야 할 때, 우리는 늘 삶이라는 파도에 속절없이 휩쓸리곤 만다. 고승민 작가도 그러했다.
그는 예기치 못한 사고로 꿈을 잠시 접고 2년의 공백 기간과 마주했다. 처음엔 모든 게 끝인 것만 같았다. 그렇지만 멈추지 않았다. 작가는 유학이라는 기회를 잡고 새로운 길로 나아갔다.
‘유럽으로 떠난 스물하나’는 고승민 작가의 유럽 여행기다. 일상이 지겨워 떠났다는 흔한 여행 이야기는 아니다. 작가는 유학을 위해 향한 유럽에서 프랑스, 이탈리아, 체코, 오스트리아 곳곳을 여행했다. 이때, 작가는 단순 학습을 넘어 삶을 배웠다.
체코 프라하 / 사진=언스플래쉬
물론 배우는 동안 고통과 외로움도 상당했다. 언어가 통하지 않아 자신의 자리임을 말하지 못한 채 좁은 의자에서 쪽잠을 자며 이동하기도 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여행을 이어갈 수밖에 없는 즐거움이 많았다. 작가는 프랑스 한 시골 마을에서 받은 사랑과 환대를 여전히 기억한다고 했다. 책은 낯선 타국이 주는 어려움을 낯선 타국이라서 가능한 사랑으로 채우는 과정을 전한다. 작가가 유학과 여행 중 느낀 어려움을 극복하며 천천히 앞으로 나아간 것처럼 말이다.
모든 역경을 딛고 단단해진 작가는 결국 ‘오히려 좋다’는 긍정적인 마음에 도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이제 어떠한 힘든 일이 있을지라도 이 또한 경험이라 확신하며 뛰어들 것이라고 말한다. 그 자체가 삶의 가치임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프랑스 파리 / 사진=언스플래쉬
“인생에는 불현듯 불어오는 바람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한때는 그것을 억지로 거스르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느 때보다 진솔하게 여행에서 발견한 것들을 한 글자씩 써 내려 가면서 나는 깨닫게 되었다. 그저 불어오는 바람대로, 흘러가는 흐름대로 살다 보면 그곳에도 나름의 길이 있고 기쁨이 있고 깨달음이 따른다는 것을.” _299페이지
혼자 떠나는 게 뭐 어때서 / 이소정 / 동양북스 / 811.8 이55ㅎ 인문과학열람실(3층)
‘혼자 떠나는 게 뭐 어때서’ 표지 / 사진=동양북스 제공
여기, 결혼한 지 8개월 된 사람이 1년 간 홀로 세계 여행을 다닌 사람의 이야기가 있다. 그 이유는 간단하다. 진정으로 배부른 날을 찾아보겠다는 것. 19세라는 어린 나이로 대기업에 입사한 작가는 외제차를 타고 고급 레스토랑을 가는 등 돈을 쓰며 욕망을 채웠다. 그렇지만 이상하게도 물건은 사도 사도 부족했고 그럴수록 마음은 공허했다.
이에 작가가 골똘히 생각한 끝에 내린 결론은 여행이었다. 결국 그는 또래가 취업을 선택할 시기, 안정적인 직장을 나왔다. 그리고 당시 결혼한 지 8개월 차였던 작가는 1년간 여행을 떠났다. 그것도 혼자서 말이다.
이소정 작가의 여행 모습 / 사진=이소정 작가 제공
‘혼자 떠나는 게 뭐 어때서’는 작가가 홀로 떠난 여행에서 경험하고 느낀 점을 정리한 책이다. 1년이라는 장기 여행 중 시기 별 계획을 세웠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작가는 무계획 여행의 진수를 보여준다.
특히 아프리카부터 남미, 인도까지 여자 혼자라면 쉽게 도전하기 힘든 여행지까지 방문했다. 낯선 곳에서 다양한 사람을 만난 작가는 새로운 삶의 태도를 경험하고 더욱 성장할 수 있었다.
이소정 작가가 여행 중 촬영한 사진 / 사진=이소정 작가 제공
“내가 여행에서 느끼는 것들은 누군가 옆에 있었다면 유난스럽다고 했을 법하다. 현재 느끼는 감정과 영감을 어디까지 끌고 갈지 타인에 의해 제어되지 않는다는 건 혼자가 주는 이점이자 단점이다. 외로움과 새로움은 한 끗 차이라 외로울수록 주변의 새로운 점을 더 많이 주시하고, 천천히, 더 깊게 흡수하게 되니까. 사소한 것들로 채워진 나의 세계는 더 선명해진다.” _p.052 ‘유난 떨기’ 중에서
이소정 작가의 여행 모습 / 사진=이소정 작가 제공
혼자 떠난 덕분에 얻은 점도 많았다. 작가는 누구에게도 잘 보일 필요도 나를 꾸며낼 필요도 없었다고 했다. 이제 긴 여정을 마무리한 작가에게 여행은 도피처가 아니다. 그는 일상에서 필요한 용기를 얻을 수 있는 존재를 여행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그는 여행 중 얻은 용기를 책에 가득 담았다. 책을 읽으며 여행의 매력과 함께 일상을 나아갈 용기를 얻어 보는 건 어떨까.